[천자 칼럼] '국민의 역린'을 건드릴 때
역린(逆鱗)은 용의 목 아래에 ‘거꾸로(逆) 난 비늘(鱗)’을 뜻한다. 한비자가 “용을 길들인 사람일지라도 그 비늘을 건드리면 반드시 죽는데, 군주에게도 역린이 있으므로 이를 건드리지 않고 설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데서 유래했다. 국가 지배권이 군주에게 있던 시절, 왕의 분노를 사 목숨을 잃은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나라의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 민의에 반하는 비리와 불공정은 언제든지 역린이 돼 권력을 무너뜨린다. 만인에게 공평해야 할 병역과 교육, 취업 문제가 대표적인 ‘국민의 역린’이다. 현직 법무부 장관 아들의 ‘병역 특혜’ 의혹과 전임 법무부 장관 딸의 ‘입시 특혜’ 의혹, 인천국제공항공사(인국공)의 ‘취업 불공정’에 2030세대가 분노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병역 문제는 한국 사회에서 가장 민감한 ‘비늘’이다. 대통령 선거판까지 흔들었다. 유력 대권주자였던 이회창 후보의 ‘아들 병풍 논란’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지만 민심은 이미 떠난 뒤였다. 추미애 법무부 장관은 당시 “국정조사를 하자”며 맹폭을 퍼부었다.

그랬던 추 장관에 대해 같은 당 소속 국회의원까지 나서 “교육과 병역 문제야말로 국민의 역린이고, 공정과 정의 면에서 중요한 문제”라며 빠른 수사를 촉구할 정도가 됐다. 법무부가 영어로 ‘Ministry of Legal Affairs(법적 업무부)’가 아니라 ‘Ministry of Justice(정의부)’라는 사실을 장관이 모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잇따르고 있다.

입시·취업 관련 불공정성 또한 뜨거운 뇌관이다. 전 정권의 정유라 부정입학 사건이 무색할 정도로 현 정부 들어서도 입시 의혹과 인국공 사태 등이 계속 터지자 청년들이 분노하고 있다. 대학생들은 촛불집회를 열고 “정부가 그토록 내세웠던 공정과 정의는 어디에 있느냐”고 외쳤다. “토익시험 열 번을 보고 허벅지 찔러가면서 14시간씩 공부한 난 호구”라는 한탄도 나왔다.

전문가들은 “평창동계올림픽 때 남북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반발했던 사례 등 청년들의 역린을 건드리는 사건이 잇따르는데도 여권이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20대의 대통령 국정수행 긍정평가가 1주일 새 7.1%포인트 떨어진 42.6%로 주저앉았다. 취임 때(82%)의 반토막이다. ‘국민의 역린’을 건드린 결과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