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출범 땐 6월부터 지급 약속
조건 까다로워 기업들 신청 꺼려

이상은 마켓인사이트부 기자 selee@hankyung.com
[취재수첩] 석 달 넘게 '휴업' 중인 기간산업안정기금

지난 4월 22일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이 주관한 비상경제회의에서 40조원 규모 ‘기간산업 안정기금(기안기금)’을 신설하기로 결정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으로 경제활동이 눈에 띄게 위축된 때였다.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하루빨리 도와야 한다는 긴장감에 후속 절차도 신속하게 진행됐다. 산업은행법 개정안은 발의 6일 만인 4월 2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5월 12일엔 시행령 개정안이 국무회의에서 의결됐다. 5월 20일 산업은행은 35명 규모 조직인 기간산업안정기금본부를 꾸렸다. 정부는 “속도감 있게 자금 지원을 추진하겠다”며 6월 중 자금을 집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보도자료를 내놨다.

그런데 막상 출범 100일이 다 돼가는 지금까지 이 돈을 가져다 쓴 대기업은 하나도 없다. ‘총 차입금이 5000억원 이상이면서 300인 이상 고용기업일 것’과 같은 장벽이 너무 높아서다. 6개월간 고용을 10% 이상 줄이지 못하는 등 제약도 많다. 시중금리보다 낮은 금리도 허용되지 않았다. ‘돈을 퍼줬다’는 비난도, ‘돈을 안 줬다’는 지적도 모두 피할 방법을 궁리한 결과다.

처음엔 지원 대상을 항공업과 해운업으로 한정했다가 7월 초에야 9개 업종으로 넓혔다. 그래도 △지원 대상 업종에 속하고 △오직 코로나19 때문에 어려워진 것이 확실하고 △5000억원 이상 여신에 △300인 이상을 고용하면서 △돈 받은 뒤에도 6개월간 90% 이상 고용을 유지할 수 있는 기업 조건을 충족할 지원기업을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아무리 추려봐도 대한항공 정도만 꼽힐 뿐이다.

대한항공도 자금 지원 신청을 안 했다. 대한항공 내부에선 “돈은 필요하지만 기안기금 대신 채권단에서 직접 지원을 받고 싶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채권단 눈치를 받는 것이 주렁주렁 족쇄가 달린 기안기금을 수령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얘기다.

대한항공조차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이자 정부 내에선 아시아나항공의 기안기금 신청을 내심 기대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40조원이 논다’는 소리가 듣기 싫은 것이다. 은성수 금융위원장이 “HDC현대산업개발과의 딜이 깨지면 아시아나항공도 기안기금을 신청할 수 있다”며 바람을 잡았다. 그러나 조(兆) 단위 지원을 한 뒤 그 돈을 갚아야 살 수 있는 매물을 만들겠다는 것이라는 비판도 제기된다.

산은의 기금본부는 지난달 시중은행에서 추천하는 협력업체에 최대 1조원을 빌려주는 프로그램을 가동하기 시작했다. 2000여 개 기업이 심사를 받고 있고 일부는 대출을 받았다고 한다. 좋은 일이지만 처음부터 40조원의 문턱을 낮췄으면 더 좋았을 것이다. 이제라도 1조원이 아니라 40조원 전체를 곤경에 처한 기업들이 가져다 쓸 수 있게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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