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미국의 대공황 극복 실패경험에서 배워야
정부는 대규모 재정 투입으로 디지털 산업과 녹색 산업을 육성해 고용을 확대하고 사회안전망을 확충한다는 ‘한국판 뉴딜 종합계획’을 지난 14일 발표했다. 2022년까지 67조7000억원을 투입해 일자리 88만7000개를, 2025년까지 160조원을 투입해 일자리 190만1000개를 창출한다는 야심 찬 구상에 ‘뉴딜’이라는 이름표를 단 것은 아마도 미국을 대공황의 수렁에서 구한 것이 프랭클린 루스벨트 행정부가 펼친 뉴딜 정책이라는 ‘믿음’ 때문일 것이다.

고교 교육과정의 ‘정치경제’ 과목을 통해 국민적 상식이 된 이 믿음은 과연 옳을까? 대공황을 끝낸 게 뉴딜 정책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아니다. 뉴딜 정책이 시행된 다음에도 미국의 실업률은 1940년까지 계속 두 자릿수였다. 공황이 발발한 지 10년, 뉴딜이 시작된 지 6년이 지난 1939년에도 미국인 다섯 명 가운데 한 명은 실업상태였다.

미국이 경기침체와 실업의 늪에서 잠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은 2차 세계대전이었다. 전쟁은 1939년 1700만 명에 달했던 실업자 문제를 거의 일시에 해소했다. 1200만 명 이상이 전쟁에 동원됐고 비슷한 숫자가 군수산업에서 일했다. 이 때문에 많은 역사가는 대공황을 끝낸 게 전쟁 시기의 대규모 재정지출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로버트 힉스를 위시한 일부 경제학자는 이 결론에 의문을 제기한다. 왜냐하면 전시 호황은 엄청난 재정 부담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채는 1941년 490억달러에서 1945년엔 2600억달러로 급증했다. 한마디로 실업을 부채로 바꾼 데 불과했다.

전시 수요가 궁극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잘 이해한 것은 루스벨트와 뉴딜러들이었다. 독일과 일본이 항복하면 다시 공황이 올 것이라고 우려한 이들은 전쟁 기간 중지되거나 폐지된 뉴딜 프로그램의 부활을 모색했다. 하지만 1945년 루스벨트가 사망하자 뉴딜의 부활은 후임 해리 트루먼의 과제가 됐다. 뉴딜 신봉자였던 트루먼은 여러 연설을 통해 민간부문의 일자리가 부족하면 정부지출로 일자리를 만드는 완전고용법을 제시했다. 국민의료 프로그램과 주택공급 프로그램도 밀어붙였다.

하지만 1946년의 정치 상황은 1933년과는 딴판이었다. 1933년에는 민주당이 의회에서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고 여론도 루스벨트의 뉴딜을 지지했다. 1946년 민주당이 다수이긴 했지만 차이는 근소했다. 보수적인 남부의 민주당 의원을 빼면 다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과거 뉴딜의 부진한 실적 때문에 뉴딜의 부활에 환호하는 미국인도 줄었다.

공화당 의원과 남부 민주당 의원들은 트루먼이 제안한 뉴딜의 부활을 거부했다. 물타기도 하고 숫제 부결시키기도 했다. 대신에 이들은 세금을 삭감해 기업이 스스로 투자를 통해 귀향군인을 위한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유도했다. 오랫동안 약탈적인 고율의 세금에 시달려 온 기업인들은 이런 유인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의회는 연간 20만달러를 초과하는 모든 소득에 부과하던 초과이윤세(최고한계세율 94%)를 폐지하고 법인세율을 최고 38%로 삭감하는 한편 개인소득세 최고세율도 86%로 인하했다.

이 세율도 여전히 매우 높은 게 사실이었지만, 1920년대 이후 최초의 세금 삭감으로 기업에 번 돈을 더 많이 가질 수 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 결과 1920년대의 ‘체제에 대한 믿음’이 회복됐다. 좀 더 자유로운 시장, 균형예산 그리고 낮은 세율과 더불어 경기는 자연스럽게 회복됐다. 1946년 실업률은 단 3.9%에 불과했고 이후 10년간 비슷한 수준에 머물렀다. 대공황은 그렇게 끝났다.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 미국의 뉴딜 꼴이 나지 않으려면 그 실패의 경험에서 배워야 한다. 최근 벤처 스타트업 업계에서 정책 대부분이 자금 지원과 산업 육성에만 몰렸을 뿐 중요한 ‘규제 혁신’이나 ‘정책 개선’을 담은 내용이 없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수많은 디지털 신사업이 올가미 규제에 걸려 좌초된 상황에서 자금을 앞세운 정책만으로는 한계가 있다. 기업이 스스로 나서서 뛸 수 있는 환경을 먼저 조성해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