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병연 중소기업부장
[데스크 칼럼] 스스로 성장판을 닫는 기업들

“자산과 매출을 줄여갈 계획입니다.”

한 중소기업인이 사석에서 건넨 말이다. 기존 사업을 줄이고 미래를 위한 투자도 자제하겠다는 선언이었다. 경기침체에 코로나19 사태까지 겹쳐 생사의 기로에 선 기업이 수두룩한 와중에 잘나가는 기업인의 ‘의도된 역성장’ 계획은 뜬금없이 들렸다. 하지만 그의 설명을 듣고는 이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중소기업을 벗어나는 순간 가시밭길이 펼쳐집니다. 지원에선 배제되고 없던 규제들이 사슬처럼 옭아매기 시작합니다. 국세청 조사도 세지고 기부금과 성금 등 각종 준조세도 몰려옵니다. 상속 문제까지 꼬이게 되죠. 이런 상황에 누가 기업을 키워 중견기업이 되려고 하겠어요.”
기업 성장 옭아매는 규제
성장은 기업의 목표 중 하나다. 성공적인 경영을 통해 회사 규모를 키우는 건 기업인의 본능이다. 그럼에도 기업들이 성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그 길에 덫처럼 놓인 ‘규제 계곡’ 때문이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진입하는 순간 다양한 난제에 봉착한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이 글로벌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선 아홉 번의 규제 장벽을 넘어야 한다. 단계마다 수십 개의 규제가 추가된다. 세액 공제 등 각종 지원에선 배제된다.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이 되면 달리 적용받는 법률만 200건이 넘는다.

기업들이 성장하려 하지 않는 현상, 소위 ‘피터팬 증후군’은 획일적인 규제가 낳은 한국 산업계의 병리 현상이다. 기업 단계별로 도사린 규제 사슬이 기업의 성장 본능을 막는 괴물이 됐다. 잡아온 사람을 침대에 눕힌 뒤 키가 침대보다 크면 다리를 절단하는 그리스 신화의 거인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말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중견기업으로 커진 일부 업체가 자산을 줄여 중소기업으로 회귀하려는 성향을 기업 탓으로만 돌릴 순 없다. 중소기업으로 남기 위해 기업을 쪼개는 등 각종 편법도 동원되는 게 현실이다.

이런 현상이 어제오늘 일도 아니다. 정부는 그동안 수차례에 걸쳐 기업의 피터팬 증후군을 유발하는 성장 걸림돌 규제를 뿌리뽑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기업인들에겐 아직 공언(空言)처럼 들릴 뿐이다.
규모별 칸막이 해체해야
정부는 기업군을 ‘자산 1000억원’ ‘매출 1500억원’ 등 획일화된 외형과 규모의 잣대로 구분해 규제와 지원 대상을 설정하고 있다. 공공시장 진입 금지 등 각종 규제는 물론 세제, 금융, 판로 등 거의 모든 분야에 대한 정책 지원이 기업 외형에 따라 결정된다.

기업 규모별 칸막이부터 철폐해야 한다. 기업을 매출이나 자산 규모로 구분하는 건 산업개발 시대의 행정편의주의적 유물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2차 산업 시대의 잣대를 들이대는 격이다. 산업별로 정책목표를 정해 기업의 단계별 지원과 규제를 유기적이고 신축적으로 정해가야 한다. 기업 규모기준은 하나의 통계지표로만 사용하고, 지원 정책은 기업의 성장 단계별 또는 유형별로 대상을 정해 시행하라는 얘기다. 수시로 신산업이 탄생하고 기존 업종이 사라지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같은 기업군에서도 필요한 지원과 규제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소기업은 ‘보호’, 중견기업은 ‘지원 배제’, 대기업은 ‘규제 대상’이라는 고착된 정책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 이 같은 당국의 인식이 바뀌지 않는 한 기업들이 스스로 성장판을 닫은 채 네버랜드에 머물려고 하는 부작용을 피할 수 없다.

yoob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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