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의 서재] 셰익스피어도 해적판 피해자였다
땅이나 건물, 보석이라면 모르겠다. 도대체 지식이 어떻게 재산일 수 있는가? 미국 시카고대 역사학과 교수 애드리언 존스는 《해적질: 구텐베르크에서 게이츠까지 지식재산 전쟁》(2010년)에서 역사 속으로 이 질문을 다시 던졌다. 그는 지식재산이 근대 이후 ‘창의성과 상업(creativity and commerce)’이라는 양극단의 동기가 충돌하면서 이룩된 타협의 산물임을 밝혔다.

이 충돌은 근대 자유 시민권이 전제왕권에 저항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경쟁과 독점, 공유와 사유, 자유와 예속, 평등과 특권처럼 대립하는 사회이념 간 전투 속에서 지식재산의 지위와 형태는 지역마다 시대마다 다르게 전개됐다.

고대와 중세사회에서 해상 노략질의 대상은 주로 물품이었지만,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등장하면서 그 대상이 바뀌기 시작했다. 필사(筆寫) 대신에 고속 복제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등에 업고 16~17세기 유럽에서 인기 서적의 복제 출판물이 쏟아져 나왔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 뉴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근대 계몽주의도 그 덕에 빠르게 확산될 수 있었다.

[CEO의 서재] 셰익스피어도 해적판 피해자였다
복제 서적의 범람은 독자의 지식욕 충족과 창의성 자극이라는 면에서는 반길 일이지만, 정본 출판사 입장에서는 기필코 막아야 할 일이었다. 17세기 영국은 자율등록 문화를 통해 이 질서를 유지했다. 출판업자들은 런던 스테이셔너홀에 비치된 등록부에 출간예정 도서를 기재했고, 서로 동업자의 도서 목록을 확인하며 상도의를 지켰다.

이 합의를 어기는 자들이 있었지만 처벌할 길이 없었다. 저작권을 규정하는 법 자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분쟁이 일어나면 그때마다 재판정을 찾아야 했다. 일부 출판사는 군주로부터 특정 도서 발행 및 납품 특권을 인정받은 문서, 즉 ‘페이턴트(patent)’를 발급받기도 했다. 전형적인 정경유착을 통한 특권 확보였다.

뉴턴과 비슷한 시대에 저명한 식물학자 느헤미야 그루는 지하수에서 약용 소금을 추출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런데 프랜시스 몰트와 조지 몰트 형제가 이를 도용해 자신의 이름으로 팔았다. 서로 상대를 표절자라고 몰아붙이며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 1698년 그루는 자신의 명예를 지킬 최후 수단으로 왕에게 호소했고 끝내 페이턴트를 받아냈다.

이후 창의성과 상업 동기 사이에 공방과 숨바꼭질의 숨 가쁜 역사가 펼쳐졌고, 1967년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지식인이 지식의 재산화를 찬성하는 그룹과 반대하는 쪽으로 나뉘었다.

제한된 자유를 주장했던 영국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은 자유방임이 가져올 무질서를 막기 위해 특허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개인과 이성의 능력을 존중했던 칸트도 지식인의 저작권을 고유한 재산으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프랑스 혁명기 진보주의 철학자 콩도르세는 누구든 단체 결성이나 권력 행사를 통해 지식을 독점할 권리는 없다고 말했고, 현대 정보통신 이론의 개척자 노버트 위너는 지식재산이 과학의 진보를 가로막는 장애물이라고 믿었다.

소프트웨어의 재산 및 특허 가치 개념이 희박했을 당시, 상업 동기에 충실했던 빌 게이츠는 소프트웨어 문화에 일대 혁명을 일으켰다. 그랬던 게이츠조차 창의성 동기의 위력을 알았기에 불법 복제판을 적당히 눈감으면서 그 확산을 조장했다.

21세기 지식재산 그물은 웹사이트 이미지로부터 시작해 유전자원 관련 정보까지 대상이 될 정도로 촘촘해져서 숨이 막힐 지경이다. 반면 기업들은 자바(Java) 등 오픈소스 소프트웨어를 채택하고, 구글의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와 유튜브 플랫폼처럼 과거에는 꿈도 꾸지 못했을 방대한 공유의 천국이 열리기 시작했다. 미래 지식재산 전쟁이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지난 400년 대립의 결과 오늘날 세계가 창의성과 상업 동기를 조화시키면서 양자를 극대화하는 것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 같다.

송경모 < 고려대 기술경영전문대학원 겸임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