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은(銀)의 재발견
기원전 3000년 무렵 이집트에서는 은(銀)의 가치가 금(金)보다 2.5배 높았다. 은 대부분을 수입했기 때문이다. 은 채굴법이 개선되면서 기원전 2200년께부터 은의 가치는 금과 같아졌다가 점점 내려갔다. 15~16세기 유럽의 신항로 개척 이후 아메리카 대륙에서 은이 대량 유입되자 가치는 더 떨어졌다. 그 대신 통화 효용이 높아져 은화를 기본으로 하는 은본위제도가 정착됐다.

은본위제의 빛과 그림자를 가장 극적으로 겪은 나라는 중국이었다. 청나라는 도자기와 차(茶)를 수출하면서 서구와 일본 등의 은을 무섭게 빨아들여 세계 최대 은 보유국이 됐다. 그러나 영국이 무역역조를 만회하기 위해 수출한 인도산 아편 탓에 은이 마구 유출되면서 파국을 맞았다. 한때 일본에서 들어오던 은도 바닥났다. 결국 19세기에 영국 주도의 금본위제도가 등장했다.

경제사학자들은 금과 은의 정상적인 가격차를 60배 정도로 본다. 시장에서도 통상 50~80배를 오간다. 그런데 코로나19 확산 이후 금·은 가격차가 120배 이상으로 벌어졌다. 최근에도 100배 안팎을 오르내리고 있다. 금과 함께 대표적인 안전자산으로 평가되는 은의 수요는 늘어나는데 가격이 저평가됐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미국 경제미디어 마켓워치는 최근 “전 세계에 돈이 넘치고 실질금리 하락이 계속될 가능성이 높으므로 금·은은 강세를 보일 것”이라며 “수천 년간의 데이터를 볼 때 지금은 금보다 은을 살 때”라고 진단했다.

세계 경제가 회복되면 은의 가치가 더 높아질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은이 산업용 금속으로 많이 쓰이기 때문이다. 은의 산업용 비중은 거의 50%에 육박한다. 10% 미만인 금보다 훨씬 높다. 5G 장비와 태양광 패널에도 사용된다. 경기 침체에서 벗어나면 산업 수요가 늘고 그만큼 은 소비가 늘어날 전망이다.

세계적인 투자가들이 은에 관심을 보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짐 로저스 로저스홀딩스 회장은 블로그에서 “금 가격이 최고치인 데 비해 은 가격은 최고치의 70~80%”라며 “금과 은 보유량을 계속 늘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누가 나에게 둘 중 하나를 골라달라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은을 택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세계경제 흐름을 보면서 ‘때로는 은이 금보다 더 빛나기도 한다’는 세상 이치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