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사태로 벼랑 끝에 몰린 기간산업을 살리기 위해 정부가 40조원 규모로 조성한 기간산업안정기금(기안기금)이 한 달째 ‘개점휴업’이다. 기간산업 전반이 최악의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5월 말이나 6월 초에는 지원에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정부의 당초 예상이었다. 그러나 기안기금 운용심의위원회는 그제 열린 5차 회의에서 운용규정조차 확정하지 못했다.

기간산업의 위기가 경제 전반과 고용에 미치는 충격을 최소화하려는 목적으로 정부가 이 기금의 조성 계획을 처음 밝힌 것은 지난 4월 22일이었다. 이후 국회에서 관련 법(산업은행법)이 1주일 만에 통과된 것을 포함해 5월 28일 정식 출범에 이르기까지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이런 속도전과 “기간산업을 반드시 지켜내겠다”(문재인 대통령)는 정부 의지를 감안할 때 최근 한 달간의 ‘저속 모드’는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대해 산업은행은 “세부 운용규정을 마련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있다”고 해명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은 정부가 정한 까다로운 지원 조건이 기업들의 신청을 막고 있다는 게 경제계 지적이다.

기안기금 지원 대상은 ‘차입금 5000억원, 근로자 수 300명 이상인 기업’이다. 코로나 사태가 어려움의 직접적 요인이라는 점도 입증해야 한다. 지원 대상인 해운업을 보면 이 요건을 충족시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 있다. 우선 150여 개 해운사 중 요건을 충족시키는 기업이 10여 곳에 불과하다. 이 중 2~3곳이 신청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이들은 코로나로 실적이 악화된 것을 입증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신청자격을 갖춘 곳들도 고용유지, 이익공유 조건에 부담을 느낀다. 5월 1일 기준으로 근로자 수를 90%이상 6개월간 유지하고, 지원금액의 10%를 주식연계증권으로 기금에 발행해야 한다. 이게 언제 ‘발목’을 잡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상당수 지원 후보 기업들이 ‘버틸 때까지 버티겠다’는 방침이다.

당장 기금을 신청하는 기업이 없다고 사태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마냥 손놓고 있기보다 자동차 부품, 철강, 건설 등으로 지원 대상 업종을 다양화하고, 지원 요건도 완화해 생존 가능한 기업들이 ‘돈가뭄’에 쓰러지지 않도록 선제적으로 움직여야 할 것이다. 국민 혈세가 포함된 40조원이 코로나가 끝날 때까지 쌓여만 있어선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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