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병석 칼럼] 이젠 한국은행까지 민주화하라니…
경제 민주화의 불길이 한국은행으로까지 번졌다. 지난주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전문가 초청 간담회에선 “한은의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다. 강연을 한 여당 측 경제학 교수는 “우리 경제에서 가장 공정하지 않은 분야가 금융”이라며 한은의 의사결정기구인 금융통화위원회의 구성을 문제 삼았다. 그는 “위원 7명 중 2명을 은행연합회와 대한상공회의소가 각각 추천하는데, 노동자 자영업자 청년을 대변할 위원은 없다”고 했다. 그러니 이들 대표도 넣자는 얘기다.

계층 간 양보와 타협을 위한 사회적 협의기구와 고도의 전문성·중립성을 생명으로 하는 금통위를 혼동할 리 없는 전문가 입에서 나온 말이라 더욱 주목된다. 이 교수는 “한은이 돈을 마구 찍어서 물가가 100배 오르면 100억원을 가진 사람은 돈의 실질가치가 1억원으로 줄지만 돈이 없는 사람은 피해가 없다”고도 했다. 결국 중앙은행의 통화정책도 계급적 시각에서 민주화해야 한다는 논리다.

이쯤 되면 경제 민주화의 남용(濫用)이라고 할 만하다. 이미 경제 민주화는 문재인 정부에서 경제 문제를 푸는 만병통치약처럼 통한다. 시장 경쟁의 결과로 발생한 불균형과 양극화에 대해 정부여당이 내놓는 처방전은 사회안전망과 복지 강화를 넘어선 경제 민주화다. 최저임금을 올리고 근로시간을 줄이는 소득주도성장, 회사 경영에 노조도 참여시키는 노동이사제, 대기업 이익을 중소기업과 나누라는 이익공유제 등 정부여당이 추구하는 주요 정책의 바탕엔 계층 간, 노사 간, 대·중소기업 간 불평등을 뿌리부터 바꾸겠다는 민주화 신념이 깔려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6·10 민주항쟁 기념 연설에서 언급한 ‘평등한 경제’도 같은 맥락이다. 그는 “지속가능하고 보다 평등한 경제는 제도의 민주주의를 넘어 우리가 반드시 성취해야 할 실질적 민주주의”라고 했다. 정치 민주화만이 아닌 경제 민주화를 달성해야만 진정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말로 이해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전 세계 유례가 없는 중앙은행의 민주화와 같은 주장이 나오는 것도 전혀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이 대목에서 경제 민주화란 말의 오용(誤用)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말의 근거는 1987년 개정된 헌법 119조2항이다. 미래통합당의 김종인 비상대책위원장이 삽입했다고 주장하는 이 조항은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중략)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하여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경제민주화론자들은 이 조항을 갖고 평등 경제의 추구를 정당화한다.

그러나 당시 국회 헌법개정소위 위원장을 맡았던 현경대 전 의원은 그건 오독(誤讀)이라고 말한다. 헌법 해설서인 《신헌법》(박문각, 1988)을 쓰기도 한 그는 “119조2항의 경제 민주화는 정치 민주화에 맞춰 경제운영도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꾸자는 의미”라고 설명했다. 관치를 탈피한 경제운영의 민주화란 뜻이다. 이게 지금 불평등 경제를 시정하는 정부 역할 강화의 근거로 쓰이고 있는 건 아이러니다. 이 조항이 ‘대한민국의 경제질서는 개인과 기업의 경제상의 자유와 창의를 존중함을 기본으로 한다’는 119조1항의 보완 개념임에도 시장의 자유와 창의를 억누르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도 정상은 아니다.

민주화를 경제에 접목할 땐 신중해야 한다. 경제와 민주주의는 태생적으로 궁합이 잘 맞지 않아서다. 자유와 평등이 이념적 기초인 민주주의는 1인 1표의 절대 평등을 추구한다. 반면 시장경제의 작동원리는 차등이다. 경쟁의 결과에 따라 차등적 혜택이 돌아가고, 그게 노력의 동기부여가 돼 발전하는 게 경제다. 차등적 결과가 누적돼 낙오자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게 사회안전망이고 복지다.

시장의 한계와 경쟁의 부작용을 치유하는 정도를 넘어 아예 판을 바꾸려는 경제 민주화는 경제를 오히려 망칠 수 있다. 평등이 강조되는 경제에선 발전의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하향평준화를 부를 뿐이다. 그래서 망한 게 공산주의 경제다. 경제 민주화의 오남용을 경계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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