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황해도 피란민 구출 작전
6·25전쟁 발발 4개월 만인 1950년 10월, 중공군 30여만 명이 밀어닥쳤다. 압록강까지 진군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후퇴를 거듭했다. 11월에 평양을 내줬고, 12월 10일에는 황해도 해주까지 빼앗겼다.

피란민도 대거 황해도로 몰렸다. 함경남도 흥남에서 10만 명이 배로 탈출하는 동안 황해도 피란민은 중부전선이 막히는 바람에 오도가도 못했다. 청년의용군이 게릴라전으로 적을 막느라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었다. 피란민은 장산반도 끝 덕동포까지 쫓겼다.

1951년 ‘1·4 후퇴’ 다음날 긴박한 상황을 파악한 해군은 곧 의용군을 지원하는 함포사격과 함께 피란민 구출작전에 나섰다. 1월 12일 유내혁 대위가 지휘하는 YMS-309함이 500여 명을 구출한 데 이어, 양한표 대위가 이끄는 YMS-304함이 800여 명과 1300여 명을 잇달아 구했다. 그 사이에 적은 의용군을 계속 위협했고 피란민 수는 더욱 늘었다.

가장 많은 피란민을 구한 날은 1월 18일이었다. PC-704함장인 현시학 소령은 양한표 대위 등과 합동작전을 펼치며 피란민 5000여 명을 한꺼번에 구했다. 추격하는 적을 함포로 저지하면서 의용군과 그 가족 500여 명도 함께 탈출시켰다. 이들이 1월 말까지 구한 피란민은 6만2082명이었다.

이 작전의 복병은 영하 20도의 강추위였다. 해안이 얼어붙어 피란민을 군함에 바로 태울 수 없었다. 결국 함정과 육지를 로프로 연결해 한 명씩 태워야 했다. 한편으로 쌀 8000가마니와 소금 200가마니 등 긴급 식량도 조달했다.

피란민의 임시 거처인 백령도에서는 장티푸스가 발병해 또 다른 곤욕을 치렀다. 이런 악조건을 뚫고 민간인뿐만 아니라 적진에 고립된 유격대와 의용군까지 구출해냈다. 이듬해에도 백령도~연평도~인천 항로로 피란민 1만3000여 명을 무사히 이송했다.

당시 대위였던 고(故) 양한표 소령은 이 같은 공로로 올해 충무·화랑 무공훈장을 동시에 받았다. 이들 ‘숨은 영웅’ 덕분에 새 삶을 찾은 황해도 피란민은 전남 지역에 주로 정착했다. 흥남 철수 피란민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듯이 이들은 여수 중앙시장에서 재기를 꿈꿨다. 영화 ‘국제시장’의 흥남 피란민 얘기와 달리 황해도 피란민 사연은 6·25전쟁 70주년인 지금까지 세상에 덜 알려져 있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