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창] 일본인의 민도는 정말 다를까
지난 4일 일본 국회에서 다른 나라와는 일본인의 “민도(民度)가 다르다”고 한 아소 다로(麻生太郎) 재무상의 발언이 물의를 일으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응에서 일본인의 사망률이 낮은 것은 자국민의 민도가 높기 때문이라며 우쭐대듯 한 말이다. 그가 든 사망률만을 놓고 본다면 한국이 일본보다 민도가 높다. 지난달 25일 기준 일본 코로나19 대책본부 자료에 따르면 사망자 수를 감염자 수로 나눈 사망률은 한국(2.4%=266÷1만1190)이 일본(5.0%=830÷1만6581)보다 훨씬 낮기 때문이다.

아소가 한국을 그렇게 칭찬하고 나올 리는 없다. 오히려 아소는 자신의 민도 발언에 대한 야당 의원들의 반성 촉구가 있던 9일 “(일본의 낮은 사망률은) 틀림없이 자랑스러운 수치다. 한국과 같은 선상에 두지 말라”며 “(정부의) 강제력이 없이 모두 자주적으로 임한 것이 가장 대단하다. ‘요청’만으로 국민이 찬동하고 힘써 줬다. 국민으로서의 질이 극히 높다”고 반발했다(6월 11일자 아사히신문). 이런 발언은 상당수 일본인으로부터 환심을 살 수는 있겠지만 객관성이 결여됐고, 한국인 입장에서 보면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일본 정부는 어떤 일을 추진할 때 ‘임의를 위장한 강제’ 방식을 곧잘 이용한다. 강제하지 않는다고 문턱을 낮춰 유도한 다음 종국에는 따를 수밖에 없도록 동조적 분위기를 형성하는 수법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국기 게양과 국가(國歌) 제창을 장려하기 위해 1999년 8월 공포 시행한 ‘국기·국가 법제’다. 법 시행 당시에는 임의적 준수 사항이라며 강제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문부과학성은 국립대학 행사 때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국가 제창을 요청했고 이젠 거의 모든 대학이 그 요청에 따르고 있다.

일본 사회 근저에는 ‘암묵적 동조(同調) 압력’이 짓누르고 있다. 정부의 강제력 없는 ‘요청’이라고 하더라도 개인이나 기업이 그 요청을 어기고 개별 행동하기 어려운 공기(空氣)에 휩싸이곤 한다. 평론가 야마모토 시치헤이는 “(일본에는) 우리 모두에 대해 어떤 논의나 주장을 초월해 구속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공기의 연구》, 16쪽)고 했다. 그 무엇인가는 해야만 하게 만드는 공기(분위기)다. 상황을 지배하는 공기에 구속되다 보면, ‘시비곡직(是非曲直)을 명확히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돼 버린다. 결국 “그런 공기를 양성(釀成)하기 위해 정부로부터 시사(示唆)를 받은 자의 계획적인 캠페인”(같은 책, 49쪽)에 굴복하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민도가 다르다’는 말에는 은연중에 일본 국민의 민도가 높다는 차별 의식이 배어 있다.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통치할 때 ‘내선(內鮮)일체’라는 구호를 내걸었다. 내(內)는 일본을 의미하고 선(鮮)은 조선을 뜻한다. 그러니까 ‘조선을 내지(內地) 일본과 일체화’한다는 명분이지만, 조선인의 민도를 내지인(일본인)과 동등하게 끌어올린다는 내외차별론이 자리 잡고 있다. 안쪽을 향해 있으면서 밖의 것들은 내부의 방식에 따르도록 하려는 방향성이다.

섬나라 안에서 안과 밖을 구분하고 ‘복(福)은 안(內)에 있고 귀신은 밖(外)에 있으라’며 내향성을 굳혀온 일본이다. 아소의 ‘민도가 다르다’는 발언은,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위상이 내려가는 가운데 자국민을 향해 자긍심을 갖게 하려는 립서비스(입발림)라고 하겠다. 반면 그 말은 밖을 향한 열린 대화를 막아버려 민주주의 시민으로서의 ‘민도를 낮추는’ 폐단을 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