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모두에게 버림받을 양다리 외교
코로나 팬데믹(대유행)이 세계 정치를 바꾸고 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슈퍼 파워로서 전 세계에 공공재를 제공하며 모범국 역할을 해온 미국이 국제 방역체계를 구축하는 데 기여하기는커녕 국내 보건도 제대로 챙기지 못해 결국에는 국제사회 리더십의 실종 사태를 가져왔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사태를 이렇게 만들어 재선을 위태롭게 한 중국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진원지로 지목하며 응징에 나섰다. 이것이 최근 미·중 충돌의 선거 공학적 배경이다.

하지만 미·중 충돌은 본질적으로 세계 패권 경쟁이다. 물론 지금의 미·중 충돌은 냉전시기 미·소 간의 대결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기적 갈등에 해당하기 때문에 ‘패권 투쟁’이 아니라 ‘전략 경쟁’의 차원으로 봐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과거 미·소 대결과 달리 두 진영에 소속된 국가가 명확하지 않고, 중국 진영에 속한 국가라고 해봐야 북한, 쿠바를 꼽을 정도로 친중 진영이 왜소하기 때문이다. 또 미·중 군사대결도 동북아시아에 국한돼 ‘동북아 신냉전’으로 언급될 뿐 세계 각지에 전선이 형성됐던 미·소 대결과는 결이 다르다.

하지만 미·중 충돌이 세계 패권 투쟁의 모습을 보이는 측면도 주목해야 한다. 미래 패권을 결정짓는 요인은 영토가 아니라 기술인데, 기술 경쟁의 측면에서 중국이 놀라운 추격을 보이고 있고, 빅데이터 등 일부 앞서는 부분도 있다는 점에서다. 강대국 패권투쟁에서 등장하는 ‘상호 적대감’과 ‘대결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두려움이 증가하고 있는 상황도 주시해야 한다.

그레이엄 앨리슨 미 하버드대 교수는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에서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설명하며 기존 강대국과 부상하는 신흥 강대국 사이에 “과연 전쟁이 필연적이었을까?”라고 질문한다. 그러면서 전쟁으로 이끄는 주요 동인으로 이해관계, 두려움, 명예를 꼽는다. 미·중의 ‘이해관계’는 이미 갈등관계에 있다. 다음은 ‘두려움’인데 미국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추진을 “아테네가 끝없이 팽창하며 스파르타의 동맹국을 잠식하기 시작함에 따라 스파르타가 더 이상 묵과할 수 없는 위협”으로 인식한 것과 같은 두려움에 도달해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명예’는 생각보다 분명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명예는 자신을 당선시켰고 재선을 가능하게 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꿈의 실현에 달려 있다. 시진핑 주석의 명예인 ‘중국몽(中國夢)’의 실현과는 공존할 수 없다.

이미 미국은 중국을 지리적으로 포위하고 있다. 두려움을 느끼는 중국은 사사건건 미국에 “참견 말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명예를 건 두 강대국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면 미·중은 패권을 건 열전(熱戰)에 돌입할 것인가? 중요한 예시가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국과 중국은 한반도에서 격돌해 각각 3만5000명, 15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중 충돌이 위협을 넘어서 열전으로 전환되기 힘든 이유다.

문제는 한반도다. 중국은 역사적으로 한반도를 핵심 이해 지역으로 보고 개입해왔다. 지금은 한국을 대중 포위망의 ‘약한 고리’로 이해한다. 북한이 느닷없이 탈북단체의 전단 살포에 대한 문재인 정부의 대응을 트집 잡고 몰아치며, 미국에 강경발언을 쏟아내는 시점과 최근 미·중 대결의 격화와 사드(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 장비 반입 시점이 일치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동북아 신냉전 환경 속에서 중국이 해야 할 미국·한국 견제를 북한이 대행하는 모습이다.

한국은 선진 번영국가로 갈 길이 멀다. 북핵에서 안전하지도 않다. 대중 포위망의 ‘약한 고리’로 보이는 것도, 북한의 트집 잡기 대상이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무대응은 굴종의 다른 모습일 뿐이고, 미·중 양다리 외교는 양자 모두에게 버림받는 선택지다. 한·미 동맹의 원칙 속에 한·중 우호 확대라는 실리 추구, 적극 외교와 조용한 외교의 조화, 주변국과 화해하고 새로운 우방을 찾아 나서며 자강(自强)의 길을 가는 명민(明敏) 외교를 실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