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이펀 원리' 속의 과유불급

70% 이상 차면 넘치는 '계영배'
과욕 경계한 巨商의 성공 비결

피타고라스 컵 닮은 와인잔까지
권력도 인생도 지나치면 화 초래

고두현 논설위원
[고두현의 문화살롱] '임상옥 술잔'과 '피타고라스 컵'의 비밀

소설 《상도(商道)》의 주인공 임상옥은 어릴 때 노비로 팔려갔다. 집안의 몰락으로 빚을 갚지 못해 대중(對中) 무역을 하는 의주 상인 밑에서 허드렛일을 했다. 그는 역관(통역관)을 꿈꿨던 아버지에게 중국어를 배운 덕에 남다른 재능을 발휘했다. 이를 눈여겨본 주인의 배려로 장사의 도(道)를 하나씩 익혔다.

18세 때 본격적으로 상업에 나선 그는 초기 10년간 숱한 고초를 겪었다. 그 쓰라린 과정을 통해 국제 무역시장의 원리와 신용의 중요성을 몸으로 터득했다. 사람의 됨됨이를 면밀히 살피는 신중함도 배웠다. 홍경래가 난을 일으키기 전 그의 밑에 위장취업했을 때 “물상 객주집 서기로는 그릇이 넘친다”며 내보내 반란에 휘말리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가 중국 상권까지 뒤흔들 정도로 거부가 될 기회는 42세 때 찾아왔다. 사신단의 일원으로 인삼을 싣고 베이징으로 간 그는 중국 상인들이 인삼 값을 낮추려고 불매동맹을 펼치자, 인삼을 불태우는 ‘역발상 전략’으로 맞서 몇 배나 비싼 값에 팔고 인삼 무역의 글로벌 승자가 됐다. 소설에서는 스님의 가르침에 따른 것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예전 사행길에 동행했던 추사 김정희의 조언 덕분이었다.

그는 재산이 늘어날 때마다 스스로 과욕을 경계했다. 그 증표로 ‘계영배(戒盈杯·넘침을 경계하는 잔)’를 곁에 두고 마음을 다잡았다. 계영배는 술이 70% 이상 차오르면 밑바닥의 작은 구멍으로 모두 새어나가게 만든 잔이다. 컴퓨터단층촬영으로 들여다보면 잔 안에 둥근 기둥이 있고 거기에 작은 구멍이 뚫려 있다.

과학적으로는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사이펀은 공기의 압력 차이로 액체를 이동시키는 원통형 막대를 말한다. 빈 컵에 구멍을 뚫고 구부러진 빨대를 끼운 뒤 물을 채워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다. 어항의 물을 가는 고무관이나 S자형 배수관도 같은 원리다.
[고두현의 문화살롱] '임상옥 술잔'과 '피타고라스 컵'의 비밀

서양에는 이와 비슷한 ‘피타고라스의 컵’이 있다. 기원전 6세기에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가 만들었다. 물이 부족한 그의 고향 사모스 섬에서 물과 와인을 아끼기 위해 발명했다고 한다. 이 컵에 일정 수위 이상 물을 부으면 밑으로 다 새어버린다. 요즘은 피타고라스 컵 원리를 활용한 와인 잔과 커피 잔도 나와 있다. 화학 실험기구인 ‘탄탈로스의 접시’ 또한 이런 원리로 고안됐다.

몇 해 전 국립중앙과학관의 ‘고대 그리스 과학기술 특별전’에서 피타고라스의 컵을 처음 보았다. 계영배는 여러 차례 공개됐다. 국립중앙박물관(4개)과 개인 소장(1개) 등 5개가 전해져 온다. 계영배를 고안한 사람은 19세기 실학자 하백원과 도공 우명옥이지만, 그 유래는 기원전 7세기 중국 제나라 환공의 ‘기기(器·기울어지는 그릇)’에서 찾을 수 있다. 비어 있으면 기울고, 절반쯤 차면 바르게 놓이고, 가득 차면 엎어지는 그릇이다.

이 신기한 그릇을 본 공자는 “가득 채우고도 기울지 않는 것은 없다”며 무릎을 쳤다. 제자가 ‘채우고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묻자 “지혜로우면서도 어리석은 듯 지키고, 큰 공을 세우고도 겸양으로 지키고, 용맹하면서도 낮춤으로 지키고, 천하를 가질 정도로 부유하면서도 겸손으로 지켜야 한다”고 일렀다.

‘소년 노비’의 설움을 딛고 조선 최고의 거상(巨商)이 된 임상옥에게 과유불급과 상도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해준 것이 곧 계영배의 원리였다. 이는 재물과 이익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었다. 그는 나라에 기근이 닥칠 때마다 사재를 털어 사람들을 구했다. 그 공로로 종3품 벼슬까지 올랐으나 곧 물러나 20년간 빈민을 구제하며 채마밭을 가꾸는 것으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호 ‘가포(稼圃)’는 채마밭 가꾸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시문집 《적중일기(寂中日記)》와 《가포집(稼圃集)》을 남겼으니, 실물경제와 인문정신의 꽃을 조화롭게 피운 일생이었다. 계영배에 새겨진 ‘가득 채워 마시지 말기를 바라며/ 죽을 때까지 너와 함께하길 원한다’는 글귀에 그의 인생이 압축돼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나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권력도 인생도 마찬가지다.
북핵 6자회담 美 대표, 계영배 얘기로 北 설득

계영배는 북한 핵문제를 둘러싼 국제 협상 테이블에서도 숨은 역할을 했다.

2007년 2월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북핵 6자회담에서 북측 수석대표인 김계관이 한·미 합동 군사훈련 중단 등 무리한 요구를 계속했다.

미국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는 주한 미국대사 때 선물로 받은 계영배 얘기를 꺼냈다. 너무 욕심을 부리면 판이 깨지고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는 점을 암시한 것이다. 그동안의 만남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해 회담 무용론까지 나오는 상황이었다. 결국 북한은 더 이상의 군사적 요구를 철회하고 100만t 수준의 에너지 원조에 합의하는 것으로 물러섰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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