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행이 민간 기업에 사실상 직접 자금을 공급하는 ‘가보지 않은 길’을 결단했다. 민간 기업 회사채와 CP(기업어음) 매입을 위해 정부가 다음달 출범시키는 10조원 규모의 특수목적기구(SPV)에 발권력을 동원해 8조원을 지원키로 한 것이다.

중앙은행의 금융시장 안정 의지가 명확히 전달돼 정책효과가 클 것이라는 게 한은의 기대다. 우량채권(AA 이상), 비우량채권(BBB~A)은 물론 코로나 사태로 ‘투기등급(BB 이하)’으로 떨어진 저신용 채권까지 매입 대상인 만큼 기업들에 단비와 같은 소식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걱정스런 대목도 많다. SPV 설립 방식을 둘러싸고 정부와 갈등을 빚은 한은은 당초 SPV를 직접 지원하기보다 산은 대출을 희망했다. 대출받은 산은이 SPV에 출자하면 손실위험을 피해갈 수 있어서다.

지금 같은 방식은 SPV의 손실이 2조원을 넘어서는 순간 손실이 한은으로 전이된다. 설마 부도율이 20%까지 높아지겠느냐고 하겠지만 미래는 알 수 없다. 지난 4월 한 달간 3대 국제신용평가 회사는 76개 국가(중복 포함)의 신용등급을 하향했다.

통화신용정책의 대전제는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택적·차별적 방식의 지원은 세금을 걷는 정부가 국민의 동의 아래 실행하는 게 원칙이다. 비용이 들지 않는다고 발권력을 함부로 동원한다면 정부가 힘들게 세금을 걷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렇게 찍어낸 돈은 가치가 추락하고 인플레이션과 같은 부작용의 위험에 직면할 수밖에 없다.

한은은 통화정책을 만병통치약처럼 확대 처방하는 게 국제금융시장의 새로운 흐름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실제로 미국 중앙은행도 우리와 비슷한 구조의 SPV를 벌써부터 가동 중이다. 저간의 이런 사정은 참작요인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면책사유는 못 된다. 미국 유럽 일본과 같은 기축통화국과 한국의 통화정책이 같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가벼이 여기는 상황에서 ‘최종대부자’로서 중앙은행의 역할이 점점 막중해지고 있다는 점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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