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뉴딜'과 반대로 가야 한다
대공황이 ‘뉴딜(New Deal) 정책’에도 왜 그토록 오래갔는가에 대한 분석은 다양하다. 그중에서도 기업활동이 위축돼 대공황이 더욱 깊어졌다는 경제사학자 로버트 힉스의 관찰은 지금도 되새겨볼 만하다. 당시 많은 기업인이 규제와 사회주의화를 방불케 하는 정책이 기업의 이윤 추구 행위와 자유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것으로 느꼈다는 게 힉스의 주장이다. ‘체제 불확실성’은 기업 활동을 접게 한다는 점에서 가장 무섭다.

뉴딜은 1930년대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대공황에 대처하기 위해 시행한 경제부흥 정책으로 소개되고 있다. 경제적 자유주의를 수정해 정부가 경제 활동에 적극적으로 개입함으로써 경기를 조정해야 한다는 방침과 함께 은행 통제 확대, 관리 통화제 도입, 농업 생산 제한, 대규모 공공투자 집행 등 추가 설명도 따라붙는다. 뉴딜 하면 공공 프로젝트를 연상하지만, 기업인들 중에는 통제·관리·제한 등의 공포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정부는 ‘한국판 뉴딜’을 예고했다. 대공황 당시 경제를 구한 건지 망친 건지 아직도 논란인 지난 세기 뉴딜을 굳이 소환해야 하는지 의문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상경제 상황에서 수요와 일자리 창출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한국판 뉴딜’은 토목공사가 아니라 디지털 프로젝트라고 했지만, 공공투자의 승수효과는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창출된 일자리의 지속성에도 한계가 있다.

더 큰 문제는 위기다 싶으면 공공 프로젝트부터 꺼내는 정부의 타성이다. 위기 속에서도 물꼬만 터주면 강이 되고 바다가 될 민간투자를 막고 있는 분야가 한두 곳이 아니다. 공공조달 시장을 혁신 제품과 서비스의 확실한 구매자로 확 바꾸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신산업 육성과 지속적인 일자리 창출에는 옵션이 많이 주어질수록 더 효과적이다.

정부가 유동성 위기에 직면한 기업을 긴급 지원하면서 생살여탈권을 쥔 듯이 구는 것도 경계해야 할 일이다. 비상경제 상황에서 기업이 일시적 유동성 위기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사회적 비용은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위기 시 유동성 지원은 개별 기업에 주는 특혜가 아니라 경제 전체의 비용 대비 효과 측면에서 합리적 판단에 따른 것이다.

정부가 유동성 지원을 조건으로 정상화 시 회수하는 차원을 넘어 기업의 이윤 동기를 침해하거나 경영권 위협을 느끼게 하는 순간, 기업활동을 위축시키는 또 다른 규제가 되고 만다. 이윤 추구 행위와 자유 시장경제를 위협하는 ‘체제 불확실성’은 경제회복을 더욱 멀어지게 할 뿐이다.

정부가 ‘포스트 코로나’까지 생각한다면, 20세기 뉴딜과는 반대로 가야 한다. 규제 강화와 메가(mega) 공공투자 집착이 아니라, 규제 혁파와 매스(mass) 민간투자 유인이 그것이다. 실망스럽게도 정부가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노동·환경 등 규제 유예 결단이라도 내려야 할 판국에 알맹이도 없는 10대 산업 65개 규제혁신 과제나 내놓고 있다. 민간투자가 아니라 공공투자로 신산업을 육성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공허하기 짝이 없는 소리다.

포스트 코로나의 핵심은 위기에 더욱 강해지는 경제 체질로 가는 것이다. 나심 탈레브는 《블랙스완(black swan)》과 짝을 이루는 《앤티프래질(antifragile)》에서 예상치 못한 충격이나 가변성에 노출되면 오히려 더 성장하는 것, 모험과 불확실성을 즐기는 것을 ‘앤티프래질’로 불렀다. 기업가 정신과 꼭 닮았다. 성장은 평균이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 아이디어를 실행에 옮기는 꼬리 부분의 사람들을 늘리는 데서 온다는 주장도 마찬가지다.

실패해도 도전하는 기업인이 많은 경제가 위기에 더 강할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언제 또 위기가 닥칠지 예측하기 어렵다면 ‘큰 정부 경제’가 아니라 ‘앤티프래질 경제’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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