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학력의 비애와 인생의 성패
초등학교를 전교 수석으로 졸업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모범생으로 꼽혔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늘 칭찬만 들었고, 동료 학우들과는 말다툼 한 번 벌인 적이 없었다. 여러 번 전했듯이 ‘초·중·고 12년 개근’이라는 놀라운 기록을 세웠다. 특히 중·고등학교 때는 30리 길을 도보로 통학했다.

방학 때와 일요일, 공휴일을 빼고는 매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머나먼 길을 걸어서 왕복했다. 고등학교 때는 ‘근로장학생’으로 본연의 학업과 학습용 원지 필경, 학교 협동조합 구매부 운영 등 1인 3역을 감당했다.

여러 차례 아슬아슬한 고비가 있었다. 난데없는 복통과 몸살감기 등으로 몸져누워야 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쓰러져도 교문 안에 들어가 쓰러지면 출석이고, 교문 밖에서 쓰러지면 결석이라는 비장한 각오로 입술을 깨물며 이른 새벽 집을 나섰다.

고3 여름방학 때였다.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하던 중 우연히 서울의 어느 대학 학보에 게재된 전국 고등학생 문예작품 현상모집 광고를 발견했다. 방학 동안 부랴부랴 단막희곡 한 편을 써서 응모했고, 당선작 없는 가작1석으로 입상했다. 비록 당선작까지는 이르지 못했지만 일단 장학생 자격을 확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여간 기쁜 게 아니었다.

그런데 웬걸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져 있었다. 생존은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장학생이고 뭐고 따질 겨를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각 ‘밥벌이’에 나섰다. 오직 굶어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해 저 쓰라린 가시밭길을 헤쳤다. 그러면서도 나름의 실력을 쌓으려고 끊임없이 책을 읽으며 공부했다.

그 힘든 밑바닥 중노동을 거쳐 사무직으로 전환했을 때 이번에는 또 다른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학벌이었다. 고졸자는 흔해 빠진 대졸자들 틈바구니에서 항상 ‘찬밥’일 수밖에 없었다. 대졸자보다 몇 배씩 기를 쓰고 죽도록 일을 해도 고졸자는 어디까지나 고졸자일 따름이었다. 심지어 어떤 회사에서는 유능한 고졸자의 급여가 무능한 대졸자 급여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학술기관이 아니라 단순한 일터일 뿐인데도 그랬다.

이런 학력 차별의 비애를 극기(克己)로 뛰어넘어 아주 평범한 진리를 깨닫는 데는 꽤 긴 세월이 필요했다. 인생의 성패는 결코 번드르르한 학벌, 재산, 직급 따위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동서고금의 입지전적 인물들은 그런 세속적인 외형을 초월해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함으로써 인간 승리의 높은 경지에 올랐다. 나는 오래전부터 여러 위인을 거울삼아 죽는 날까지 노력하고 또 노력하리라 작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