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재숙 < 문화재청장 johanal@korea.kr >
[한경에세이] 백남준의 선견지명

오래 잊고 지낸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비디오 아트의 선구자 백남준(1932~2006)이다. 최근 공개된 힐러리 클린턴 전 미국 국무장관 관련 다큐멘터리 ‘힐러리’에서 남편인 빌 클린턴이 했다는 고백 때문이다. 미국 대통령으로 재임 중이던 1998년, 그는 백악관 인턴 모니카 르윈스키와의 성추문으로 탄핵 위기에 몰리는데, 그때를 회상하는 대목에서 말한다. “내가 한 행동은 끔찍했다.”

워싱턴 정가가 ‘섹스 스캔들’로 시끄럽던 그해 6월 9일, 클린턴 대통령은 미국 방문 중이던 김대중 대통령 내외를 위해 국빈 만찬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 초대받은 백남준 선생은 뇌졸중으로 반신마비가 된 몸을 휠체어에 싣고 만찬장에 들어섰다. 백 선생이 두 나라 대통령 앞에서 예를 갖추려 지팡이를 잡고 일어선 순간, 바지가 흘러내렸고 하반신이 노출됐다.

백남준을 잘 모르던 사람들도 해외 토픽을 탄 이 해프닝으로 그의 이름 석 자를 기억하게 됐다. 이날 밤 백 선생의 행동을 놓고 다양한 해석이 나왔다. 클린턴의 부도덕함을 에둘러 꾸짖는 행위예술이었다, 거동이 자유롭지 못한 환자의 실수였다, 권력자들 앞에서 보여준 예술가의 기질이었다 등등. 하지만 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새삼 백남준 선생과 함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빚어낸 오늘의 현실이 중첩된다. 정부가 앞으로 15일간 ‘최대한 집에 머물러 달라’는 권고를 내놓고 보니, 집에서 혼자 놀기에 좋은 여러 매체예술을 제안한 그의 선견지명이 놀라워 보이는 것이다. 한 예로 ‘침묵의 TV방송국’이 있다. 방송시간 내내 ‘무드 음악’과 같은 느낌의 ‘무드 미술’만 내보내는 채널이다. 그는 “비발디의 TV판 혹은 전자 안정제로서 모든 시청자를 위로하는 빛의 미술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백 선생은 21세기 환경의 본질은 영화나 회화보다 TV를 통해 잘 드러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국민 모두가 자가 봉쇄를 권유받고 있는 이때, 그의 ‘전자 안정제’ 개념을 응용한 콘텐츠가 하나둘 선보이니 시의적절해 보인다. 동영상 공유서비스 문화유산채널이 공개한 ‘봄, 자연, 여행 특집’ 프로그램, 문화재청이 자율감각 쾌감반응(ASMR) 이론에 따라 제작한 ‘마음 치유 문화유산’ 등은 백남준이 주창한 ‘침묵의 TV방송국’ 정신을 잇고 있다.

평균 수명은 길어지고 1인 가구는 늘어난다. 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인간은 이미 혼자 놀고 스스로 치유하며 살아야 할 숙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결핍의 시대에 백 선생의 한마디가 쟁쟁하다. “일목요연(一目瞭然), 외눈깔이라 더 잘 보인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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