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1997, 2008 그리고 2020
한국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진자는 18일 기준으로 8413명, 사망자는 91명이다. 독일과 스위스 등 확진자가 최근 급증한 일부 국가를 제외하면 사망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다. 의료진의 헌신적인 노력, 감염자를 더 찾아내려는 보건당국의 적극적인 검사 덕분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를 ‘감염병을 잘 막고 있다’고 해석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1일 갈비찜 한식을 실은 밥차를 이끌고 충북 청주 질병관리본부를 찾아갔다. 그는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빨리 증상자를 찾아내 적절한 치료로 사망률을 낮췄다”며 “입국 금지라는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고도 바이러스를 막아내고 있다”고 자평했다. 그러면서 “자화자찬하는 게 아니라 세계가 평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평소라면 ‘국민에게 잘 보이려고 저러는구나’ 하고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은 세계보건기구가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하고, 미국은 유럽 방문자 입국 금지를 발표한 날이다. 우리의 방역 시스템에 대해 세계가 칭찬하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청와대의 인식이 ‘우리는 잘하고 있다’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미국 중앙은행(Fed)이 지난 3일 정책금리를 0.5%포인트 인하했는데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청와대에 ‘호들갑’으로 비칠 만한 행동을 할 리가 없다. Fed가 15일 1%포인트를 추가로 인하하고 나서야 뒤따라갔다.

금융위원회는 공매도를 금지하는 조치만 취했다. 최근의 주가 폭락을 ‘투기세력의 준동’으로 본 것이다. 경제 부처들은 마스크 문제에 매달렸다. 대통령이 밀어붙이니 장관들까지 마스크 생산공장을 직접 돌아다니는 촌극을 연출했다. 그 누구도 대통령의 생각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것은 지난 주말에 가서였다. 금요일이던 13일 문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경제·금융 상황 특별점검회의를 주재했다. 그는 “지금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때와는 비교가 안 되는 비상경제시국”이라고 말했다. 17일에는 한발 더 나아갔다. 문 대통령은 비상경제회의를 구성한 뒤 “지금의 상황은 실물경제와 금융시장이 동시에 타격을 받는, 그야말로 복합위기 양상”이라며 “세계 경제가 경기침체의 길로 빠질 것이라는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청와대가 마침내 위기의 현실을 받아들인 것이다. 안타깝게도 주식시장에서 수많은 ‘개미’들이 깨진 지 한참 뒤였다. 코스피지수가 2000선 밑으로 떨어진 9일을 기준으로 보면 청와대가 현실을 받아들이는 데 1주일 넘게 걸렸다. ‘코드’와 관료적 사고에 길들여진 공무원들이 생각을 바꾸기까지는 얼마나 더 걸릴까.

이제부터라도 현실을 주시하자. 지금까지 밝혀진 사실은 이렇다. 코로나19 사망률은 1~2% 수준으로 독감보다 10배가량 높다. 에볼라나 메르스보다는 덜 치명적이지만 공포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면서 전염력은 독감 수준으로 강력하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코로나19 감염자가 독일 인구의 최대 70%로 확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충격은 실물경제에서부터 금융 외교 정치에까지 다층적이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 사태가 처음 터졌을 때는 글로벌 공급망이 문제였다. 팬데믹이 되면서 세계 금융시장이 초토화됐다. 관광과 항공은 멈춰섰다. 자동차 전자 등 제조업도 휘청거리고 있다. 심각한 재정적자, 누적된 가계부채, 자영업자 부도 등이 코로나 위기와 결합해 심각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도 있다.

Fed가 보름 사이에 정책금리를 1.5%포인트나 내렸는데도 주식시장이 되레 폭락했다는 것은 ‘치료제가 없다’는 냉정한 평가다. 위기가 어디서 시작되고 증폭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는 임기응변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

방역은 전문가들에게 맡겨두자. 청와대와 정부 금융당국은 총체적인 응급대응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국가의 생존을 유지하고 경쟁력을 보존하는 데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한다. 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우리는 스스로를 한 단계 업그레이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