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능(陵)의 재발견
거짓말처럼 텅 비었다. 눈 오면 눈 내린다고, 하늘 맑으면 하늘 파랗다고 사람이 미어터지던 곳이다. 사시사철 인파로 복닥거리던 뜰은 괴괴하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사태에 대해 ‘감염병 세계적 유행’을 선언한 지난 12일 서울 경복궁 풍경이다.

불과 한 달여 전만 해도 한복 입은 관광객들이 삼삼오오 기념사진을 찍으며 입춘(立春)을 즐기던 모습이 TV 화면을 장식했다. 이번엔 정반대 상황이 카메라에 잡힌다. 적막강산이다. 지난해 역대 최고 관람객 수를 기록했던 궁(宮)이 오랜만에 휴면에 들었다.

입장 바꿔놓고 생각하면 궁은 휴식년을 맞은 셈이다. 1년 내 쉴 새 없이 손님맞이에 고단했던 심신을 모처럼 달랠 수 있게 됐다. 무생물 문화유산도 쉬지 못하면 피로가 쌓여 감염에 약해진다. 정기 안전 진단에, 주기적인 복원 정비 사업을 펼쳐도 노쇠해가는 문화재를 보면 연로하신 부모님을 뵙는 듯 가슴이 저려온다.

궁이 쉬는 사이에 대역으로 떠오른 곳이 있으니 능(陵)이다. 궁은 찾는 이가 급감했는데 능은 유료 관람객이 늘어나는 추세다. 요즘 말로 하면 역주행이랄까. 천재지변에 버금가는 바이러스 재앙으로 국제 관광 인구 이동이 막히고, 사회적 거리 두기 때문에 실내 활동이 제약받는 사이각 지역에 숨어 있던 탁 트인 자연 속 능이 제 빛을 내고 있는 것이다. 수출용 궁 대신 내수용 능이랄까.

조선 왕릉은 500년 조선을 다스린 왕과 왕비가 잠들어 있는 유적지다. 명승에 값하는 자연환경과 빼어난 무덤 건축의 역사를 평가받아 200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1대 태조고 황제의 무덤인 경기 구리시 건원릉부터 대한제국 순종효 황제가 묻혀 있는 남양주시 유릉까지, 모두 40기가 저마다 고유한 멋을 뽐낸다. 왕과 왕비의 마지막 안식처였으니 그 만듦새가 오죽했겠는가. 풍수지리의 원리를 바탕으로 조상 숭배의 전통을 세심히 따져 지극정성 조성한 능은 이제 와 보니 선조들이 후손을 위해 마련해 둔 천혜의 휴식 공간이자 환경 보전 녹지대였다.

능에 들어서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걸음걸이는 느려진다. 이 나라 최고에 올랐던 이라도 이만큼이다. 국가가 동원하는 역사(役事)에 고생할 백성을 염려해 검소하고 단출하게 만들도록 배려했다는 조선 왕들의 마음 씀씀이가 바람결에 전해오는 듯하다.

어지러운 세상살이에서 잠시 벗어나 삶과 죽음을 묵상하려는 이들에게 능은 일종의 성소(聖所)다. 강제되는 격리 대신 자발적인 칩거를 선택해야 하는 시민들에게 능만큼 좋은 명상의 쉼터는 없어 보인다. 너무 멀지 않다면 한번 찾아서 이 난세에 상처 입은 마음의 복원을 꾀해보아도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