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오스카 영광'의 숨은 주역들
“이젠 문화야. 그게 우리의 미래야. 멀티플렉스도 짓고 영화도 직접 제작하고…. 아시아의 할리우드가 되자는 거지.” 1995년 3월 이재현 CJ그룹 회장(당시 제일제당 상무)이 누나인 이미경 CJ 부회장(당시 이사)과 미국행 비행기에서 나눈 대화다. 삼성에서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그때 이 회장은 영화감독 스티븐 스필버그의 미국 제작사 드림웍스에 3억달러(약 3564억원)를 투자하며 아시아 배급권을 따냈다.

그는 1998년 국내 첫 멀티플렉스 CGV를 선보이고 2000년 영화 배급투자사 CJ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는 등 25년간 7조5000억원을 투자했다. 문화산업에 대한 그의 집념은 할아버지 이병철 삼성 창업자의 ‘사업보국(事業報國)’ 철학에서 나왔다. 그는 2011년 여러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CJ ENM으로 통합하고 ‘사업보국’의 영역을 해외로 넓혔다.

그가 한국 영화산업 육성의 ‘전략가’라면 누나인 이미경 부회장은 ‘실행가’였다. 이 부회장은 300편이 넘는 영화에 투자하면서 ‘K무비’의 세계화를 이끌었다. 봉준호 감독을 지원하며 ‘살인의 추억’ ‘마더’ ‘설국열차’ 등 4편을 함께 만들었다. 칸영화제와 골든글로브에 이어 아카데미(오스카) 4관왕을 휩쓴 ‘기생충’에는 책임프로듀서로 동참했다.

하버드대학원 출신으로 할리우드 인맥까지 탄탄한 그는 2017년 아카데미상 선정위원인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AMPAS) 회원이 됐다. 칸영화제가 심사위원 10명에 의해 좌우되는 것과 달리 아카데미상은 AMPAS 회원 8400명의 투표로 결정된다. 그는 지난해부터 전 세계를 돌며 ‘AMPAS 시사회’를 열고 리셉션, 파티까지 주도했다.

이들만이 아니다. ‘기생충’의 영어 자막을 맡은 달시 파켓은 극중 ‘짜파구리’(짜파게티와 너구리를 섞어 끓인 라면)를 라면과 우동을 합친 ‘람동(ramdong)’으로 옮기고, “서울대 문서위조학과 뭐 이런 건 없냐”는 대사의 서울대를 옥스퍼드로 바꿔 외국인의 공감을 자아냈다. 시놉시스만 보고 흔쾌히 제작을 맡은 바른손E&A의 곽신애 대표도 ‘숨은 주역’이다.

이들 덕분에 ‘기생충’은 ‘오스카의 영광’뿐만 아니라 세계 40개국에서 1억2970만달러(약 1500억원)의 극장 수입까지 올렸다. ‘1000만 흥행’의 주역인 한국 관객들과 디테일의 힘을 보여준 ‘봉테일 사단’의 저력에도 경의를 표한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