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한우물'의 힘

협상의 승패를 결정짓는 요인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담당자의 전문성이 특히 중요하다. 전문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개인의 타고난 능력과 노력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절대적 시간’이 요구된다. 5년간 끌어온 쌀 관세화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끈 김경미 농림축산식품부 농업통상과장이 세간의 화제다.

그는 ‘쌀 관세율 513%, 의무 수입물량(TRQ) 40만8700t에서 동결’이라는 협상 결과를 이끌어내 세계무역기구(WTO)의 승인을 받았다. 2015년부터 미국 중국 등 5개 쌀 생산국과 벌여온 협상에서 한국의 요구 사항을 모두 관철시킨 ‘완승’과도 같은 결과다.

이런 성과는 김 과장이 6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며 탁월한 협상 전략을 짜고 실무협상을 주도했기에 가능했다. 정부 중앙부처 과장이 6년간 한자리를 지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농식품부 과장들은 한자리에 평균 2년 정도 머물 뿐이다. “상대국 협상 담당자들은 수년간 거의 안 바뀌는데 우리쪽만 바뀌면 전략적으로 문제가 있을 것 같았다. 장기간 협상에는 인적 네트워크 간 신뢰도 매우 중요하다”는 게 김 과장의 전언이다.

주요 보직을 거치며 ‘경력 관리’를 하는 대신 ‘한우물’만 파다 보니 이런 성과로 이어졌다는 얘기다. 한국 공직사회는 순환보직 전통이 강하다. 이른바 ‘요직’에는 여러 명을 돌아가며 앉혀야 조직 내 불만이 잦아든다. 여러 자리를 두루 거치는 것이 승진에도 유리하다. 공직사회만 그런 게 아니다. 자연히 각 조직의 전문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탄생의 주역인 웬디 커틀러 전 미국무역대표부(USTR) 부대표는 28년간 통상 문제만을 다룬 베테랑이다. 반면 FTA 협상 당시 한국 측 협상 담당자들은 수시로 바뀌어 미국 측이 오히려 당황했다는 후문이다. 주요 국가와의 외교 협상, 한·미 자동차협상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져왔다. 존 헤네시 미국 스탠퍼드대 총장은 20년 가까이 학교를 이끌며 아이비리그를 능가하는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서울대 총장의 재임 기간은 평균 2.7년에 불과하다.

한국 사회도 바뀌고는 있다. 인사혁신처는 전문직위제도 등을 도입해 고위 공무원들의 장기근무를 통한 전문성 제고에 나섰다.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제2, 제3의 김 과장이 나와 ‘한우물의 힘’을 계속 보여주기를 기대한다.

김선태 논설위원 k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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