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새벽녘 금강경 독송
금강경은 석가여래 말씀을 5100여 자로 기록한 불교경전이다. 전생에 웬만한 인연이 없이는 금강경을 이승에서 접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몇 년 전 서점을 들렀다가 별 생각 없이 불교서적 코너 앞에 섰다. 언젠가 퇴임하면 주역, 도덕경, 금강경 세 권의 책은 정독해 보리라 다짐을 하곤 했던 나였다. 어렵다 해서 그 뜻을 알아보려 하지도 않고 세상을 뜬다면 나 자신이 정신적으로 너무 초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금강경 관련 책들을 들춰보기 시작했다. 그중 눈에 들어온 것이 ‘100일 동안 매일 한 번씩 독송하기를 10회 하면 확실한 어떤 변화가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란 글귀였다. 10년간 금강산에서 수도한 백성욱 전 동국대 총장(1897~1981)을 만나게 된 것이다. 결국 ‘1000번을 독송하면 네가 변하리라’는 이야기였다.

집에 와 한자로 된 경을 사이사이에 한글을 섞어 천자문 외우듯 계속 외웠다. 첫 100일 동안 백 번 독송은 어떻게 참았지만, 두 번째 백 번 독송에선 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고 잘 이해가 안돼 답답했다. 그래도 외웠다. 1년이 지나자 경이 익숙해지고, 3년이 지나서는 독송이 너무 편해졌다.

금강경에 의하면 우주의 모든 것의 실상을 알게 되면 우리의 인연이 헛됨에 놀라고 무섭고 두려울 것이라고 한다. 금강경 사구게(四句偈)에는 목숨을 보시한 것보다도 공덕이 크다고 돼 있다. 또한 사회 속에서 자신의 분별심으로 알아낸 모든 것들이 실상이 아니다. 아상(我相)을 버리면 너와 내가 둘이 아니고 우주의 모든 것이 연결돼 있다는 ‘공(空)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무한 경쟁 속에서 금강경은 어떤 의미일까. 일을 열심히 하되, 자신을 위한 아상에서 벗어나라. 그러면 네가 하는 모든 일들이 시시각각 성취될 것이다. 자신을 위한 분별을 그치고, 어떠한 정보도 유불리를 따지면서 해석하지 말고, 단지 여시관(如是觀: 멍 때리면서 그저 보기)하면 우리가 세운 원(願)은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토끼와 거북의 경주에서 거북과 같은 태도가 아닐까. 거북은 시작 때부터 토끼와의 경주는 이미 안중에 없고 한걸음 한걸음 결승점을 향해, 자기가 세운 원을 실현하려고 했다. 자신만의 비전을 세우고 경쟁을 뒤로하고 우직하게 실행해 나갔던 것이다. 금강경의 시원하고 명쾌한 가르침을 내 삶에서 조금씩 실천해 나간다면 경쟁으로 찌든 모습 대신 시시각각 성취되는 새로운 내일을 맞게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