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리콘밸리에 도전하는 韓 벤처
이스라엘 못지않은 잠재력 있어
문제는 정치…AI로 바꾸고 싶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경영과학박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2001년 닷컴 거품 붕괴 전까지만 해도 한국은 벤처 지표에서 미국 다음이었다. 미국 나스닥을 벤치마킹한 코스닥은 2000년 총 거래금액이 유가증권시장을 추월했고,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벤처 금융시장으로 등극했다. 이스라엘이 한국을 벤치마킹하겠다고 찾아올 정도였다. 모든 것은 닷컴 거품 붕괴 이후 달라졌다. 나스닥은 ‘시장에서의 옥석 가리기’로 정상화됐지만, 코스닥은 정부가 규제를 강화한 ‘벤처 건전화정책’으로 긴 침체의 길에 들어섰다.

약 20년이 지난 지금 상황은 달라졌다. 세계 최대 전자쇼 ‘CES 2020’의 스타트업 전문관 유레카파크에서 이스라엘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에서 돋보였다. 22개 스타트업이 인공지능(AI) 모빌리티 등으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전사들처럼 보였다. 이스라엘은 AI 스타트업 투자에서 미국, 중국 다음이고 1인당 AI 투자에서는 세계 1위다.

한국이 대기업을 활용해 기술 기반 스타트업을 키웠다면, 스타트업이 미국 실리콘밸리로 더 일찍 눈을 돌렸다면, CES에 참가해 13개 기업 중 4개가 혁신상을 수상한 KAIST 같은 창업 아이콘이 더 많이 나왔다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 그랬다면 한국 스타트업이 이스라엘의 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란 상상 때문이었다.

아직도 늦지 않았다. 전 세계가 실리콘밸리를 모방하려 들지만 안 되는 이유가 있다. 영어와 달러, 이민의 세 박자를 다 갖추기 어렵기 때문이다. 실리콘밸리의 네트워킹과 문화까지 고려하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복제가 어렵다면 방법은 하나뿐이다. 국내 혁신생태계와 실리콘밸리 간 사람과 자본, 지식의 ‘환류(circulation) 시스템’을 형성하고 이를 강화하는 것이다.

“테크 수도 실리콘밸리로 가보자”며 도전하는 한국 스타트업 창업가들이 이 가능성을 현실로 바꾸고 있다. 현지에서 투자 유치에 성공한 김동신 센드버드 대표 같은 기업가들이다. 투자를 받기 위해 미국 법인으로 전환했고 한국에 연구개발(R&D) 지사를 두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란 것을 보여줬다.

CES를 참관한 뒤 실리콘밸리로 날아가 동문들을 찾은 김무환 포스텍 총장도 혁신의 환류에 주목했다. 김 총장은 포스텍이 양성한 인력의 현지 인턴십을 탐문했다. 국내 혁신생태계가 실리콘밸리와 개방적으로 연결되면 인턴십 후 미국에서 취업을 하든, 창업을 하든 한국의 혁신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된다는 발상이다.

한국과 실리콘밸리 간 양방향으로 사람과 자본, 지식의 고속도로가 깔리면 국내 혁신생태계는 글로벌 차원으로 확장될 수 있다. 경제규모와 산업의 스펙트럼, 인구 등으로 따지면 기대효과는 이스라엘에 비할 바 아닐 것이다.

문제는 스타트업이 아니라 다른 데 있다. 규제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글로벌 스탠더드’로만 해달라는 요구 하나 들어주지 않는 이 나라 정치요, 정부다. 한국은 이스라엘이 부러워하는 대기업들이 있는데도 기업 주도 벤처캐피털(CVC)을 제한한다. 전 세계 AI 스타트업 투자를 주도하는 ‘톱 25 벤처캐피털’에 CVC가 수두룩하지만 한국은 없다.

[안현실 칼럼] 정치가 '스타트업 강국' 막고 있다

이스라엘은 1985년 체결한 미국과의 자유무역협정(FTA)을 발판으로 혁신의 무대를 세계로 넓혔다. 한국의 정치가 영리하다면 FTA를 기반으로 유대인 네트워크 못지않은 한국판 ‘혁신의 디아스포라(diaspora·이주자 집단)’를 못 만들 이유가 없다.

마크 J 테일러는 《혁신의 정치학》에서 ‘외부 위협’이 혁신의 동력이 되는 대표적인 국가로 한국과 이스라엘을 들었다. 두 나라는 주변에 믿을 만한 국가가 없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불행히도 이 혁신 방정식은 한국에서 더는 통하지 않고 있다. 외부 위협이 닥쳐도 ‘내부 갈등’에 압도당하는 형국이다. 학습조차 안 되는 정치부터 AI로 확 바꾸고 싶다.

ahs@hankyung.com

ⓒ 한경닷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