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거일 칼럼] 트럼프 외교의 부도덕과 무지가 낳은 희비극
작년 말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부장관이 북한과 협상하러 한국을 찾았다가 북한 대표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느닷없이 찾아와서 만나자고 호소하다 북한이 대꾸하지 않자, 중국으로 가서 배회하다 결국 체면만 잃은 채 빈손으로 돌아갔다. 세계를 이끄는 나라의 고급 외교관이 ‘악당 국가(rogue state)’로 꼽히는 북한에 만나기라도 하자고 애걸하다니! 이런 외교 참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부도덕과 무지가 필연적으로 낳은 희비극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외교에서 실패한 직접적 원인은 ‘외교’와 ‘상거래’를 동질적이라고 여긴 것이다. 큰돈 벌어 협상의 달인이라고 공언한 터라, 그는 자신이 외교 협상도 잘하리라 생각했다. 상거래는 대개 2인 경기(two-person game)이고, 양자가 이익을 보며, 시장 가격이 있으므로 협상이 쉽고 간명하고 이내 끝난다. 지속적으로 거래해야만 하는 경우는 드물고 영속적 거래는 없다.

반면, 외교는 다자 경기(n-person game)여서 두 나라 사이의 협상은 모든 다른 나라와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런 영향을 가늠하는 것은 무척 어렵다. 자연히 나라마다 갖가지 연합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려 애쓴다. 무엇보다도 상거래는 한쪽이 이익이 없다고 판단하면 끝나지만, 외교는 영속적이다. 상대가 싫다고 그만둘 수 없다. 약소국은 특히 그렇다. 그래서 어느 나라나 외교관이라는 전문가 집단을 양성하고 활용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처럼 복잡하고 미묘한 외교를 상거래로 단순화한다. 미국이 무역수지에서 적자를 보거나 군사 동맹으로 지출이 많아지면 즉각적으로 그런 상태를 교정하러 나선다. 그러나 국제 관계에서 현금이 오가는 부분은 아주 작고 그리 중요하지도 않다. 이념과 전략, 지정학적 고려와 같은 요소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현금으로 국제 관계를 살피는 트럼프 대통령의 태도는 필연적으로 국제 질서를, 특히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는 자유주의 세력의 연합을 뒤흔들어 놨다. 홍콩의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면서 중국의 내정으로 여긴 데서 그의 낮은 식견이 괴롭게 드러났다.

외교의 ‘통화’는 신뢰성(credibility)이다. 국제 관계는 영속적이므로 외교에선 약속을 실행하려는 의지와 능력이 궁극적으로 중요하다. 약한 동맹국을 군사적으로 돕는 과정에서 들어가는 비용이 아깝다고 강대국 지도자가 공언하면, 동맹은 단번에 약화된다. 한 번 배신하면 신뢰성이 떨어져 강대국도 영향력이 크게 줄어든다. 미국이 시리아에서 충실한 동맹 쿠르드족을 배신한 것은 미국 외교력에 치명상이 됐다. 트럼프 정권 아래 미국의 신뢰성이 떨어지면서 함께 전체주의 세력에 맞서야 할 미국과 유럽연합(EU)이 멀어졌다. 그 틈을 러시아와 중국이 파고든다.

이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트럼프 대통령 자신의 낮은 신뢰성이다. 그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국가의 이익도 서슴없이 버린다. 북한 핵무기 문제가 어렵다는 것을 깨닫자, 그는 북한의 도발을 막았다고 내세웠다. 작년 가을부터 북한이 다시 도발하겠다고 위협하자, 자신의 재선 때까지 도발하지 말아 달라고 북한에 애걸한 것이 이번 사태다. 그동안 북한의 위협을 키운 셈이다.

보다 음산한 것은 그가 러시아의 영향 아래 놓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모스크바에서 난잡한 짓을 하다 러시아 정보기관에 약점을 잡힌 것은 널리 알려졌다. 그러나 그가 러시아에 잡힌 약점이 그것만이 아닐 가능성도 작지 않다. 평생을 KGB 요원으로 보낸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트럼프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대규모 역정보(disinformation) 공작을 벌인 것이 어찌 우연이겠는가?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러시아의 이익을 해치는 정책은 되도록 피해 왔다.

트럼프 외교가 걷잡을 수 없이 실패하면서 위험이 가장 커진 지역은 한반도다. 게다가 외교를 사익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현 정권은 트럼프 정권과 동질적이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통찰과 감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