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세계로 뻗어나가는 KAIST
한국 사회의 ‘사농공상(士農工商)’ 신분서열은 뿌리가 깊다. 조선 초기 숱한 발명을 남긴 장영실조차 말년이 비참했다. 정약용의 과학연구 업적도 흐지부지됐다. 과학·기술 천시 풍토가 외침과 망국의 배경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질곡을 딛고 ‘과학 한국’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과학기술이 없으면 산업발전은 없다”는 그의 일념은 1966년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1967년 과학기술처에 이어 1971년 KAIST(한국과학기술원)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으로 결실을 봤다. 1973년 대덕연구단지를 세웠고, 이후 4년간 전자통신연구소, 원자력연구소 등 13개 정부출연연구소도 만들었다. 세종 이래 과학인들이 가장 대접받던 시기가 이때다. KAIS는 1980년 KIST와 통합됐다가 분리돼 1989년 KAIST로 재탄생했다.

1960년대 말에 이공계 인재 양성기관 설립은 개발도상국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발상이었다.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차관 600만달러(현재가치 약 1260억원)를 받아 세운 KAIS를 문교부(현 교육부)가 아니라 과기처 산하에 두어 자율성을 보장하고, 등록금 면제와 병역특례 등 파격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 덕에 48년간 박사급 1만3000여 명 등 6만 명의 인재를 길러냈다. 과학기술계 리더의 4분의 1이 이곳 출신이고, 국내외에서 창업한 동문 기업만도 1450여 개(연매출 13조원)에 이른다.

가진 거라고는 사람밖에 없는 나라에서 이공계 인재 육성이 얼마나 탁월한 선택이었는지 잘 보여준다. 이런 KAIST 모델과 ‘한강의 기적’에 자극받아 1990년 일본 JAIST, 1991년 홍콩과기대와 싱가포르 난양공대가 잇따라 설립됐다. 2010년대 들어 KAIST의 운영시스템이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중국 등에 전수되기도 했다.

지난해 말에는 ‘아프리카판 실리콘밸리’를 꿈꾸는 케냐에 대학모델을 통째로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과학기술 피원조국이 반세기 만에 원조국이 된 것이다. 그러자 6·25 참전국인 터키에서도 ‘터키판 KAIST’를 세워달라고 요청해왔다. 한국 과학기술이 세계로 뻗어나가는 게 반갑다. 하지만 우리가 주춤한 사이에 홍콩과기대, 난양공대 등이 저만치 앞서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국가미래를 위해 과학기술만큼은 어떤 정권이 들어서든 흔들림 없어야 한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