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석 뉴욕 특파원
[특파원 칼럼] 美 '블프' 반값 TV의 비밀

지난달 29일 블랙프라이데이(블프) 때 미국 뉴욕 인근 양판점 베스트바이에 들렀다가 깜짝 놀랐다. ‘도어버스터’(doorbuster: 파격적 가격의 미끼 상품)로 내건 중국산 인시그니아 58형 TV가 199달러였다. 삼성전자의 65형 LED TV는 479달러, LG전자 55형 TV는 299달러에 팔리고 있었다. 주변 월마트에선 스펙트라 65형이 359달러, 온(Onn) 50형이 149달러에 판매됐다.

TV 회사들이 패널을 사서 TV를 제조한 뒤 미국까지 가져와 파는데 어떻게 이런 가격이 가능할지 궁금했다. 한 전자업체 영업담당에게 물었더니, 그 비결은 “거대 미국 유통업체들의 갑질”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유통의 힘이 소비자 혜택으로

그는 석 달 전 한 대형 유통업체 바이어에게 호출당했다. 이 바이어는 점포 2200개에 한 곳당 100대, 총 22만 개의 도어버스터를 납품하라고 요구했다. 평소 150달러인 상품을 99달러에 판매할 계획이니 50달러에 납품하라는 주문이었다. 블프 전단지 앞면에 크게 실어줄 테니 광고 제작비도 내라고 했다.

“원가가 100달러가 넘어 곤란하다”고 했더니 바이어는 “내년에 영업하기 싫으냐”고 눈을 부릅떴다고 했다. 이 영업담당은 “미국 영업통의 가장 큰 고충이 블프 때 도어버스트 납품 개수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라고 했다.

미국에선 월마트 아마존 타깃 등 유통업체의 힘이 막강하다. 수많은 글로벌 제조사가 3억2000만 명의 고소득 소비자가 있는 세계 최대 시장에 물건을 팔기 위해 경쟁하기 때문이다. 제조업체로선 거대 시장 미국은 놓칠 수 없는 곳이다. 50개 주의 구매력이 비교적 균일하고, 각종 표준도 같다.

그래서 하나의 제품을 생산해 엄청난 양을 팔 수 있다. 미국 시장에서 성공하면 ‘규모의 경제’를 통해 원가를 낮출 수 있다는 얘기다. 시장조사업체 IHS마킷에 따르면 지난해 세계에서 2억2100만 대의 TV가 팔렸는데 이 중 20%가량인 4330만 대가 미국에서 소화됐다.

촘촘한 유통망, 선진 정보기술(IT)과 물류를 통해 거대한 국토를 장악한 유통업체를 통하지 않고는 이런 미국 시장에 접근하기 어렵다. 유통업체의 파워고, 제조업체에는 ‘갑질’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에 따른 혜택은 소비자에게 돌아간다. 이 때문에 미국에선 인플레이션이 실종된 요인으로 ‘유통의 힘’을 꼽기도 한다.

한국선 유통 갑질로만 비난

한국에선 블프 때마다 삼성전자 등이 왜 미국에선 싸게 팔고, 한국에선 비싸게 파느냐는 비난이 나온다. 안타깝지만 그건 한국 시장의 규모와 구매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유럽, 아시아 등은 나라별로 시장이 잘게 나뉜 데다 표준과 수요도 달라 맞춤형 생산을 해야 한다. TV 플러그만 해도 여러 종류다. 그만큼 생산비가 치솟고, 해당 시장에 들어가는 기업은 감소한다. 미국에 비해 유통보다 제조업체의 힘이 상대적으로 커진다. 그래서 미국보다 높은 가격을 책정할 수 있다.

한국인이 미국과 같은 블프를 즐기려면 경제를 성장시켜 시장을 키우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유통업을 발전시켜 제조업체의 독과점을 견제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 가고 있다. 성장률은 국내총생산(GDP)이 12배가 넘는 미국에도 뒤처지고 있으며, 출산·이민 기피로 인구는 줄고 있다. 또 유통사들은 출점 제한, 휴일 영업 제한 등 각종 규제로 비틀대고 있다. 납품업체에 단가 인하를 요구했다가는 유통 관련 법률 또는 공정거래법 위반으로 처벌받을 수 있다. 지금으로선 블프는 영원히 남의 잔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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