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베트남 외교, 한국보다 한 수 위다
베트남은 ‘South China Sea(남중국해)’라는 표현에 매우 민감하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그 바다는 동해(東海)일 뿐이다. 외신이나 외국 지도에 일본해라는 표기만 나와도 울분을 참지 못하는 한국의 정서와 비슷하다. 베트남은 한(漢)의 무제가 한9군을 설치한 이후 약 1000년간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979년엔 중·베트남 전쟁으로 불리는 국경 분쟁이 발발했다. 베트남 사람들은 미국과의 전쟁으로 지쳐 있는 ‘사회주의 혈맹’을 침공한 중국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베트남과 중국 간 영유권 분쟁 역시 한·일 갈등처럼 역사적인 구원(舊怨)에 뿌리를 두고 있긴 하지만 다툼의 배경엔 보다 직설적인 이유가 있다. 키워드는 ‘에너지 안보’다. 글로벌 기업들이 ‘세계의 공장’으로 몰려들면서 베트남의 전기 수요는 매년 폭증하고 있는데, 에너지원의 보고인 동해를 중국이 빼앗으려 한다는 게 핵심이다.

베트남의 에너지 자급률은 안보를 위협받을 정도로 가파르게 떨어지고 있다. 기존 주요 전력원이던 수력마저 라오스와 중국에서 수입해야 할 상황이다. 메콩강 수량 감소로 올해 수력발전 생산량은 목표 대비 13% 감소할 것으로 예상된다.

화력발전도 사정이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발전소를 돌리기 위한 석탄 수입액은 올 들어 10개월 동안 32억달러에 달했다. 전년보다 2배 증가한 규모다. 석탄화력발전소는 환경오염의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더 이상 늘리기도 어렵다. 약 4년 전에 ‘탈(脫)원전’을 선언한 터라 결국 베트남 정부의 선택지는 갈수록 LNG(액화천연가스)로 좁혀지고 있다. 베트남이 대규모 가스전이 몰려 있는 자국의 동해를 놓고 중국과 사생결단에 나선 배경이다.

에너지 안보를 지키려는 베트남의 노력은 미·중 패권 다툼과 맞물리면서 좀 더 복잡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셰일가스 개발로 세계 1위 가스 수출국으로 올라선 미국은 베트남 등 동남아시아를 핵심 고객층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인도양과 태평양을 ‘중국의 방해 없이’ ‘자유롭고 안전한 바다’로 만드는 데 사활을 걸고 있다.

지난 8일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과 17개 기업 대표단이 하노이를 방문했을 때, 양국이 17억달러 규모 가스발전소를 짓기로 합의한 건 양국의 향후 관계를 짐작케 할 만한 상징적인 사건이다. 연달아 하노이를 방문(20일)한 마크 에스퍼 미 국방장관은 중국 해군을 격퇴할 최신형 쾌속정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베트남 정부가 미국과의 무역불균형을 수정하기 위한 명분을 내세우며, 미국산 LNG 수입을 검토하고 있는 것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베트남은 동해 최대 가스전인 까버이산 개발을 미국의 엑슨모빌에 맡겼다.

미·중 다툼을 활용해 에너지 안보를 지키려는 베트남의 ‘게임 전략’은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한국은 에너지원의 대부분을 수입한다. 남들이 부러워하던 원자력발전마저 스스로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신재생에너지 분야도 뚜렷한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있다. 미·일·호주로 이어지는 ‘LNG 해양 동맹’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신북방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북한을 경유해 러시아의 파이프천연가스(PNG)를 들여오겠다는 ‘대륙적 발상’은 망상에 가깝다는 게 점차 입증되고 있다. 사정이 이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여전히 미·중 사이에서 ‘선택 장애’를 겪고 있다. 선택이 어렵다면 줄타기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확실히 베트남이 외교에선 한국보다 한 수 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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