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상인적 현실감각'이 필요한 때
“이 사람들 큰일 내겠네!” 외환위기가 오는데도 경제가 좋다고 보고받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뒤늦게 사태를 알고 터뜨린 탄식이다. 위기가 뻔히 보여도 당하고 말았던 1997년 외환위기의 비극은 정권의 오판에서 시작됐다. 오판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차례로 무너뜨린 국제 경제 흐름조차 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야당과 노동계 등 이해집단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고백했듯이 과감한 개혁을 가로막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후보들은 구조조정이 필요한 부실기업에 오히려 지원을 약속해 해외 투자자들이 한국에 등을 돌리게 했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 외환위기를 단기간에 수습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정치철학은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공약을 과감하게 수정하는 데 뒷받침이 됐다. 위기를 극복하려면 국력을 모아야 하기에 경쟁자였던 김종필과 박태준의 손을 잡았다. 보수 성향 김중권을 비서실장으로 기용하고 청와대를 떠나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참모들도 남아 달라고 요청했다. 예상과 달리 통합의 정치를 보이자 국민도 하나가 돼, 김대중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말했듯이 ‘금 모으기 운동’이 시작됐다. 국제 사회에서는 한국을 돕자는 기운이 일어났다.

외환위기 발생 후 10년이 지난 2007년 미국발(發) 세계 금융위기가 번졌다. 선진국도 성장률이 마이너스에다 실업률은 두세 배 치솟았고, 그리스 스페인 등 남부 유럽 국가의 경제는 쑥대밭이 됐다. 한국은 개방경제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지만 다른 나라보다 빨리 위기에서 벗어나 2010년에 성장률을 플러스로 만들었다. 반미(反美) 세력이 주도한 ‘광우병 사태’는 위기 해결의 장애물이었으나 경제의 기본 원칙은 지켰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회고록에서 밝혔듯이 미국 일본 중국 등과의 통화 스와프와 균형재정 유지 덕에 사상 최고의 국가신용등급을 받아 위기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지금 경제위기의 조짐이 짙게 깔리고 있다. 성장률은 2017년 3%대에서 2년 반 새 1%대로 반토막 났다. 실업률은 3%대에서 내년 초엔 두 배나 치솟을 지경이다. 예산을 10%씩 늘려 ‘세금 일자리’로 간신히 버티고 있는 모습이다. 세계 경제가 호황일 때 ‘소득주도 성장’으로 시간을 낭비했고, 침체로 바뀌면서 수출이 격감하는 등 고난이 시작되고 있다. 외환위기처럼 정부는 오판하고, 야당이 아니라 여당이 노동계와 손잡고 개혁을 가로막는다. 재정 안정이나 일본과 협력을 주장하면 ‘적폐’로 몰리는 분위기다. 정권의 누구도 김영삼 전 대통령의 탄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말을 꺼내지 못할 정도다.

소득주도 성장이라는 경제 실험은 안에서부터 위기를 일으키고 있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라는 정치 실험 논란도 위기를 증폭시키고 있다. 국력을 모으기는커녕 흩트리고, 대통령의 독선을 견제하기는커녕 권한을 집중시켜 오판 가능성을 키우며, 위기를 극복할 힘을 깎아내리고 있다. 검찰 개혁이란 프레임으로 포장한 공수처는 안 그래도 문제의 온상인 제왕적 대통령을 절대권력으로, 국회 개혁이라고 내놓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안 그래도 이해집단에 짓눌린 국회에 군소정당이 난립하게 해 개혁을 불가능한 일로 만들 것이다.

이 위험한 정치 실험을 패스트트랙(신속처리안건)으로 강행하면 우리나라는 눈을 뜬 채 위기를 맞고, 속수무책으로 그 위기를 쳐다볼 수밖에 없는 대(大)비극으로 향하게 된다. 독재와 고(高)실업에서 헤매는 남미의 문제도 대통령제와 군소 정당 난립이라는 최악의 조합에서 비롯한다. 풍부한 석유자원으로 잘살던 베네수엘라가 공수처와 비슷한 제도에다 비례대표를 늘린 선거제도 탓에 졸지에 국민이 굶주리게 된 비극이 그렇다. 야당은 공수처와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베네수엘라행이라고 비판만 할 뿐, 정치를 넘어 삶의 문제라는 점을 국민에게 설득하지 못하고 여당에 끌려다니고 있다.

경제위기는 어떻게든 막아야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탄식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상인적 현실감각 그리고 이명박 전 대통령의 세계 금융위기 극복 경험까지 되새겨야 한다. 야당도 제 역할을 해야 한다. 이마저도 안 되면 깨어 있는 국민이 나설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