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누가 무책임한 것인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학자들 사이에선 경기침체 가능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정부는 소비가 위축된 게 아니라 공급 측 요인에 따른 일시적 현상이라고 강조했다. 경기는 탄탄하다고도 했다. 그 이후 마이너스 물가는 몇 개월 더 이어졌지만 정부는 곧 플러스 물가로 돌아설 것이라고 공언했다….’

최근 한국의 모습과 비슷한 이 얘기는 1987년 당시 일본의 상황이다. 고도성장을 이어가던 일본은 1985년 엔화가치 절상을 용인하는 내용의 ‘플라자 합의’ 후 물가 상승세가 차츰 둔화됐다. 급기야 2년 뒤에는 월별로 마이너스 물가가 나타났다. 일본 정부는 엔화가치가 오르면서 수입물가가 떨어진 점을 주원인으로 꼽았다. 구조적 변화는 아니라는 얘기다. 이 판단은 맞는 듯했다. 수개월 뒤 물가는 플러스로 돌아섰고 경기 상승세가 이어졌다. 무역흑자 행진이 계속됐고 주식시장은 더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사이 한쪽에선 계속 경고음이 울렸다. 도매물가는 마이너스를 이어갔고 투자는 줄었다. 1990년대 초를 기점으로 주가는 급락하기 시작했고 경기는 빠르게 얼어붙었다. 수년 전 마이너스 물가는 그 전조였던 셈이다. 다시 출현한 마이너스 물가는 이번엔 사라지지 않고 일상이 돼버렸다. ‘잃어버린 20년’이라 불리는 초장기 불황의 시작이었다.

일본이 불황을 피하지 못한 것은 여러 원인이 겹친다. 전문가들은 그중 대표적인 이유의 하나로 경제지표에 나타난 사전 경고를 무시했다는 점을 꼽는다. 경제지표에 전례없던 ‘숫자’가 나타났는데도 일본 정부는 ‘일시적이다’ ‘경기는 괜찮다’는 확증 편향을 가지고 이를 해석했다. 그러다가 그 숫자들이 사라지자 ‘그것 봐라’ 하는 식으로 대응했다. 불과 몇년 뒤 초장기 불황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우려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구조적 위기는 그래서 더 무섭다. 갑자기 찾아오는 유동성 위기는 누구나 체감하지만 구조적 위기는 수년간 실체를 놓고 논란이 이어진다. 그 사이에 사전 징후가 조금씩 나타났다가 묻히기를 반복한다. 부지불식간에 기업을 무너뜨리고 소비를 얼리고 재정건전성마저 훼손하고 나서야 위기는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과거에 없던 숫자들이 경제지표상에 등장했다면, 의심하고 또 의심해봐야 하는 이유다.

요즘 한국 경제지표에 나타나는 숫자들이 그렇다. 사상 초유의 마이너스 물가는 물론 점점 바닥을 향해가는 근원물가 흐름은 전례가 없다. 글로벌 경제위기가 아닌 상황에서 성장률이 2% 안팎에 그치는 것도 국민이 처음 목도한다. 21년 만의 최대 폭 투자 감소(올 2분기)와 7년 만의 경상수지 적자(올 4월)도 심상치 않다. 재정을 풀어 해결할 게 아니라 산업 체질을 바꾸고 강도 높은 혁신에 나서야 한다는 시장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청와대와 한국은행은 ‘이 숫자들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한다. 내년에는 물가가 1%대에 올라서고 성장률이 2%대 초중반 수준까지 회복될 것이란다. 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은 “경제 위기론을 너무 쉽게 언급하는 것은 무책임하다”고 했다.

정부 말처럼 올해 출현했던 숫자들은 한동안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지금 더욱 위기를 말해야 한다. 만약 사라졌던 숫자들이 다시 나타나면 그때는 이 숫자가 일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위기는 실체화돼 있을 것이고 우리가 치러야 할 대가는 더 혹독해질 수밖에 없다.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