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한·일 무역갈등, 더 끌 이유 없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규제가 100일이 넘었다. 한국이 비교적 ‘선방’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지만 섣부른 평가는 금물이다. 한·일 양국 정상의 정치적 아집과 외교적 오만이 글로벌 가치사슬에 기반한 두 나라의 통상관계를 뒤흔들고 있다. 경제 외적인 요인에 의해 기업 활동과 국민의 일상생활이 힘들어졌다. 2017년 9월 이후 하향하는 ‘L자형’ 장기 침체의 암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우리 국민 중 아베 일본 정부의 역사적 후안무치에 분노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No 아베” 목소리가 높고, ‘보이콧 재팬’이 이어지고 있는 이유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선 보다 냉철해야 한다. 국민을 선동하는 즉흥적이고 감정적인 대응은 자제하고 국가 경제를 위해 장기 계획에 따른 대응책을 고민해야 한다.

먼저, 일본으로부터 수입에 의존해 온 전자부문 핵심 소재·부품·장비(이하 ‘소부장’) 산업의 전면적인 수입 다변화와 국산화의 기회비용을 합리적으로 고려하고 있는가 묻고 싶다. 점진적인 수입 다변화에는 공감한다. 수입대체를 위한 국산화는 내수시장 확대와 국내 고용 증대의 긍정적 파급효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그러나 수입대체를 위해 자원배분을 전환함으로써 지급해야 할 대가도 커질 수밖에 없다. 몇몇 기업의 몇몇 소재 국산화는 단기적으로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산업 전체로는 막대한 대가를 지급해야 한다. 국산화 선언이 능사는 아니다.

‘소부장’ 산업의 국산화를 정부 주도적으로 추진하는 것은 승산이 있는가. 개방경제체제에서 우리 기업은 품질과 가격이 유리한 ‘소부장’을 해외에서 조달해 최종 상품의 부가가치를 높이고 글로벌 경쟁력을 향상시켜 왔다. ‘소부장’의 글로벌 공급과 수요에 대한 정보와 판단은 기업이 정부보다 우위에 있으므로 기업이 합리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을 통해 조달하도록 해야 한다. 정부 주도적인 단기 성과 위주의 무리한 국산화는 오히려 기업의 장기적 경쟁력을 왜곡시키거나 사업 리스크를 증대시킬 것이다.

대일(對日) 수입대체와 수출규제가 통상강국으로서 합리적인 대응책인지도 복기해봐야 한다.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는 결코 일본답지 못하다. 그렇다고 해서 대외 무역의존도가 일본에 비해 세 배 이상 높은 한국이 통상으로 맞대응하면 협상력의 빈곤을 자초할 것이다. 치킨게임으로 나아간다면 양국은 수출 감소, 기업의 비용 증대와 경쟁력 약화, 경제성장 둔화 등 직접적인 상호 악영향은 물론 제3국과의 무역에서도 거래비용을 증대시킬 것이다. 무역 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로서는 소탐대실이다.

핵심 ‘소부장’ 산업에서 단기적 정부 지원을 통해 중소기업이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중소기업이 섣불리 투자를 결정하거나 사업구조를 변경하기에는 위험 부담이 크다. 정부 지원이 단기적으로 보탬이 되겠지만 지속가능한 사업구조나 성장세를 보증하는 것은 아니다. 대일 수입대체용 국산화가 글로벌 시장에서 비교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신의 한 수’도 필요하다.

정부 예산을 투입하고 중소기업이 투자하도록 유도하려면 현재의 비효율성과 경쟁력 약화를 충분히 상쇄할 미래 비교우위의 발생과 외부경제효과가 전제돼야 한다. 정책적 절실함이 시장의 대응력을 추월한다면 정책 효과는 단발성에 그치기 십상이다. 중소기업 문화와 발전의 토양이 없는 지원책은 ‘희망고문’이 될 것이다. 막대한 정부 보조금이 통상 마찰의 복병이 될 수도 있다. ‘트럼프 효과’에 의해 각국은 통상규범을 공격적으로 확대 적용하는 추세인데, 안보 이슈와 더불어 보조금 이슈를 ‘필살기’로 사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낙연 총리가 일왕 즉위식에 참석하기 위해 22~24일 일본을 방문한다. 한·일 양국 정부의 정치적 이해타산이 기업과 국민의 경제활동에 더 이상 장애요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