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는 명저] "불통은 쇠락을, 소통은 번영을 낳는다"
중국인들이 최고의 명군(名君)으로 꼽는 이가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초상화)이다. <정관정요(貞觀政要)>는 당나라 태평성대를 연 그의 정치 철학을 담은 책이다. 태종 사후 약 50년 뒤 사관(史官) 오긍(吳兢)이 태종과 신하들이 정사를 논한 내용을 문답집 형식으로 엮었다. 군주의 도리와 인재 등용 등을 담아 동아시아에서는 ‘최고 제왕학(帝王學)의 교과서’로 통한다.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불리는 태종의 치세(627∼649)는 중국 역사상 가장 번영했던 시기 중 하나다. 정관은 태종 때의 연호(年號)이고, 정요(政要)는 ‘정치의 요체(要諦)’란 의미다. 중국 역사서들은 “백성들이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줍지 않고, 여행하는 사람들은 도둑이 없어 아무 데서나 노숙을 했다”고 당시를 기록했다.

적까지 포용해 조언 구한 당 태종

[다시 읽는 명저] "불통은 쇠락을, 소통은 번영을 낳는다"
당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인 태종은 아버지를 설득해 수나라에 반란을 일으켰고, 중국 재통일 과정에서 큰 공을 세웠다. 하지만 형 건성(建成)이 태자에 봉해지자 그를 죽이고, 아버지를 겁박해 황위를 찬탈했다.

그는 황위에 오르자 스스로 부족함을 깨닫고 진영을 초월한 인재 등용과 경청의 리더십으로 당의 황금시대를 열었다. 치밀한 방현령(房玄齡)과 결단력이 뛰어난 두여회(杜如晦) 등의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다. 형에게 자신을 살해할 것을 수차례 주청했던 위징(魏徵)을 중용해 그의 쓴소리를 정책에 적극 반영했다. “건성의 부하로서 옳은 진언을 했다”며 위징의 당당함을 높이 산 것이다. 이런 태종의 포용력이 있었기에 위징 역시 진심으로 태종과 백성들을 위해 직언을 멈추지 않았다. 위징은 태종 치세의 핵심 인물이 됐다.

태종은 자신의 용모가 우락부락해 신하들이 기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는 진언자가 주눅 들지 않도록 항상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신하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는 <순자>에 나오는 ‘군주민수(君舟民水)’라는 사자성어를 자경문(自警文·스스로 경계하는 글)으로 삼았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능히 배를 띄울 수 있지만 전복시킬 수도 있다’는 뜻이다.

위징은 황제에게 300번 넘게 간언했다. 위징은 “윗사람의 행실이 바르면 명령하지 않아도 일이 순리대로 실행이 됩니다. 하지만 행실이 바르지 못하면 명령을 내려도 제대로 실행되지 않습니다. 폐하께서는 인격수양을 게을리하시면 안 됩니다”라는 개인적인 충고까지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잘못을 지적하는 위징을 보면서 태종은 ‘위징 울렁증’이 생길 정도였다. “한번은 태종이 사냥을 가기 위한 준비를 했다가 ‘위징이 반대할 것 같다’고 생각하고는 이를 그만 뒀다. 하루는 좋은 매를 진상받고 감상하고 있는데 위징이 들어왔다. 태종은 본능적으로 매를 품 안에 숨겼다. 위징은 국사를 보고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위징은 태종이 매에 푹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참을 있다가 위징이 물러가자 태종은 품 안의 매를 꺼냈지만 이미 질식해 죽어 있었다.”

태종의 인내심은 때로는 한계에 달했다. 조회 때 위징의 깐깐한 간언에 분노한 당 태종은 “끌어내어 참(斬)하라”는 말을 몇 차례 했다. 하지만 끌려나가는 위징을 보고는 매번 “내가 잘못했다. 그만 두어라”고 외치곤 했다.

위징이 태종에게 설파한 것은 ‘양신(良臣)·충신(忠臣)론’이다. “충신은 자신도 죽고 가족과 가문도 풍비박산 납니다. 군주도 악인으로 낙인 찍혀 결국 나라도 망합니다. 남는 것은 충신의 이름 석 자뿐입니다. 하지만 양신은 살아서는 편안한 삶을 살고 명성을 얻으며, 죽어서는 가문도 대대손손 번창합니다. 군주 역시 태평성대를 누리고 나라도 부유해집니다. 저는 폐하의 충신보다는 양신이 되고 싶습니다.”

'군주민수(君舟民水)' 새겨 태평성대 열어

태종은 위징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그가 643년 병사하자 사흘간 식음을 전폐했다. 묘비의 조문도 직접 썼다. 태종은 위징의 빈자리를 보고 이렇게 한탄했다. “구리로 거울을 만들면 의복을 바로 입을 수 있다. 옛일을 거울로 삼으면 나라의 흥망성쇠를 알 수 있다.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세상 사는 이치와 이해득실을 알 수 있다. 나는 이 세 가지 거울을 가지고 스스로의 잘못을 막으려 했다. 이제 위징이 죽었으니 거울 하나가 없어진 셈이다.”

태종은 645년 30만 대군으로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가 참패했다. 그가 “(고구려 침략을 반대했던) 위징이 살아 있었다면 이 같은 어리석은 짓을 못하게 했을 텐데”라고 후회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얘기다.

오긍은 태종의 치세를 이렇게 평가했다. “태종의 위대함은 스스로 완벽하지 않음을 인정한 데 있다. 태종은 최고 권력자인 군주의 잘못된 행동이 나라 전체에 엄청난 재앙을 가져온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비추는 거울 같은 신하를 옆에 두고 천하를 다스렸다.”

스스로 부족함을 알고 몸을 낮춰 끊임없이 조언을 구했던 태종의 치세 비결은 14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던진다. 역사는 예외 없이 ‘불통의 리더십은 쇠락했고, 소통과 포용의 리더십은 번영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김태철 논설위원 synerg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