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천재지변에 우는 일본
일본에는 ‘지진, 번개, 화재, 아버지’라는 말이 있다. 일본인이 무서워하는 순서대로 나열한 것이다. 1~3위를 지진, 번개, 화재가 차지한 데서 천재지변에 대한 일본인의 두려움이 읽힌다. 보름 전 세계경제포럼(WEF)의 ‘각국 기업인들의 최대 걱정’ 조사에서도 일본은 기상이변을 꼽았다. 한국이 ‘실업’, 미국이 ‘해킹’을 꼽은 것과 대비된다.

일본인에게 재해는 숙명과도 같다. 전 세계 진도 6.0 이상 지진의 20% 정도가 일본 열도에서 발생한다. 도쿄 같은 대도시에서도 수시로 지진·여진 경보가 울리고, 몇 분 뒤 온몸에 진동이 전해지면 두려움을 피해갈 방도가 없다.

화산 분화도 진행형이다. 활화산이 86개로 전 세계의 10%선이다. 일본의 상징 후지산 내부도 여전히 부글부글 끓고 있다. 1707년에 마지막으로 터진 이후 300여 년 동안 분화기록이 없지만 “재분화가 임박했다”는 관측이 많다.

큰 피해를 주는 재해로 연 평균 27개씩 찾아오는 태풍도 빼놓을 수 없다. 한국에서도 사라호 매미 등의 악명이 높지만, 일본 태풍은 훨씬 치명적인 피해를 줄 때가 많다. 12~13일 일본열도를 강타한 ‘하기비스’도 열도에 ‘공포의 1박2일’을 남기고 떠났다. 한 해 강수량의 30~40%를 하루이틀 만에 쏟아냈다. ‘구조를 기다리지 말고 각자 목숨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던 재해당국의 비장한 경보가 불행히도 들어맞았다.

숙명과도 같은 재해를 원망만 하기보다 예술로 승화시킨 데서 일본의 진면목이 드러난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齊·1760~1849)가 그려 일본의 상징이 된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는 태풍의 단골진로인 가나가와 앞바다의 거친 파도를 포착해낸 것이다. 이번에 하기비스가 1000㎜가 넘는 기록적인 폭우를 남기고 떠난 곳의 바로 그 바다이다. 자연의 시련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극복해나가는 일본의 정신을 형상화한 이 그림은 유럽으로 건너가 인상파를 태동시키고 자포니즘을 만들어냈다.

일본인들이 스스로를 ‘신국(神國)’으로 인식하는 것도 재해와 더불어 사는 삶에서 비롯됐다. 13세기 두 차례나 침범한 몽고의 대군이 때마침 불어닥친 폭풍에 휩쓸려 상륙하지 못하자 ‘신이 지켜주는 나라’라는 의식이 태동했다. 천재지변에도 줄서기를 잊지 않는 ‘질서의 일본’이 태풍 하기비스도 툭툭 털고 평상으로 돌아오기를 응원한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