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시스템문화의 힘
몇 년 지난 일이지만 가끔 미국에서 연구년을 보냈던 시절이 떠오른다. 미국 중서부의 한 주립대에 머무를 기회가 있었다. 이 대학의 첫인상은 안정감 있고 조용했다. 대학 캠퍼스가 주축인 한적한 시골 도시이다 보니 더욱 그런 느낌이었는지 모르겠다. 수업 중인 강의실 옆에서 각종 시끄러운 행사가 열리는 국내 캠퍼스 문화와는 사뭇 달랐다. 대학이라는 조직 안에서 강의와 연구에 방해가 되는 개인들의 행동은 가능한 한 절제되는 모습이었다.

이들과 생활하다 보면 ‘하이(Hi)’ ‘익스큐즈미(Excuse me)’ ‘생큐(Thank you)’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처음에는 매우 친절하고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규범’이라는 커다란 틀(시스템) 속에서 자신의 이익과 합리성을 조화롭게 추구하며 나름 매우 엄격한 삶을 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사거리 교통신호 시스템이다. 아주 복잡한 곳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거리에는 좌회전 신호가 없다. 이런 곳은 자신의 책임하에 항상 비보호 좌회전이 가능하다. 신호등이 아예 없는 사거리도 많다. 이런 곳은 예외 없이 정지(stop) 해야 한다. 사거리 정지선에 먼저 도착한 차가 먼저 가는 시스템이다. 감시자도 없고 모두가 자율적이다. 그런데도 문화와 국적이 다른 외국 학생들까지도 모두 이런 낯선 시스템을 잘 지키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또 하나는 연구 장비를 구입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예산이 1억원이라면 장비 구입을 위해 5000만원을 쓰고 나머지 5000만원은 장비를 운용하고 관리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한다. 사회 곳곳에서 이런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다. 장비 및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유지, 관리하는 부분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스템이라는 큰 조직 속에서 톱니바퀴가 돌아가듯 질서정연하게 생활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수많은 구성원이 일정한 역할과 책임을 갖고 원칙과 상식의 틀 안에서 하나의 큰 시스템을 구동한다. 아주 작은 나사 하나가 풀려도 시스템은 정상적인 동작이 불가능하다. 구성원 개개인의 작은 일탈이 조직운영에 방해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시스템 문화를 지탱하는 힘은 바로 모든 구성원이 책임감을 갖고 원칙과 상식의 틀 안에서 상대방을 배려하며 조화롭게 생활하는 데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