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 포럼] 연쇄 살인으로 빠질 수 있는 '부적응적 空想'
인간은 깨어 있는 시간의 47%를 이런저런 공상을 하면서 보낸다고 한다. 한 조사에 따르면 교육을 잘 받은 정상적인 미국 성인의 96%가 매일 여러 가지 종류의 공상에 빠진다고 한다. 이렇게 ‘행복한 공상가(happy daydreamers)’는 인간의 본질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정도 인지적 발달이 이뤄져야 공상이 가능하기도 하다.

아동 초기의 소꿉놀이, 의사놀이와 같은 상상놀이에서 시작해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되면 다양한 상상을 활발하게 하게 된다. 이런 상상과 환상 속에서 인간은 점차 성숙해 간다. 미래의 멋진 자신을 상상하면서 성취지향적으로 되기도 하고, 내게 위협적인 상대보다 더 강한 자신을 상상하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도 한다. 공상을 위해 특정한 시간을 소비할 줄도 알지만 동시에 지루한 시간을 견디거나 미래 계획을 세우는 데 공상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런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공상은 스토리텔링을 만들게 해주고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만족을 지연시켜 조절 능력을 키울 수 있게도 한다. 현재의 만족을 지연시키면 얻어질 미래의 큰 보상을 상상하면서 스스로를 조절하는 것이다. 긍정적이고 적응적으로 작동하는 공상은 인간의 성장에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상에는 부정적인 측면도 있다. 심리적으로 건강한 개인은 기분을 고양시키기 위해서만 공상을 사용하는 반면, 고통을 받고 있는 개인은 다른 양상으로 공상을 사용하기도 한다. 바로 공상의 위험한 측면인 ‘부적응적 공상(maladaptive daydreaming)’이다. 대인관계를 대체하고, 학업이나 직업을 대체할 정도로 극심한 판타지 경험이다. 이때 강렬한 시각적, 청각적, 감성적 요소를 갖춘 몰입이 일어나게 된다. 이뿐만 아니라 환상에 사로잡히고 싶은 필요나 욕구를 스스로 억제하는 것이 어려운 상태가 된다. 심각하게는 공상장애(daydreaming disorder)라는 정신장애가 될 수 있다.

학대에 시달리거나 강한 불안 상태에 있는 사람들은 가혹한 현실에서 안전한 내부세계로 탈출하기 위한 수단으로 부적응적인 공상을 만들어낸다. 위협적이거나 트라우마적인 상황에서 나름의 도피처로 공상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대부분 자신의 통제감을 만족시킬 수 있는 상상이거나 사회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는 공상이다. 좌절과 실패의 나약함으로부터 그 누구보다 강한 자신을 만들어 주는 비정상적 공상이다. 특히나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학대나 또래와 관계에서의 지나친 고립, 그리고 외로움은 이런 판타지, 환상하는 것(fantasizing)에 의존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부적응적 공상은 문제가 될 수 있다. 성인이 되면서 점차 자신의 역할이 바뀌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판타지 속에서 자신은 더 이상 수동적인 피해자가 아니라 강력하고 잔인한 가해자가 된다. 이런 역할의 전환은 가상의 복수를 하면서 자신의 트라우마나 고통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게 해준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공상에 대한 의존은 점점 증가하고, 그만큼 사회에서 고립되고 부적응하게 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된다. 그런 공상은 매우 중독성을 띠며 강제적인 특성을 갖고 있다. 환상이 점점 지속되면서 가상세계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고 환상을 현실로 바꾸고 싶은 욕구가 강해진다.

부적응적 공상은 ‘병적인 몰입(pathological absorption)’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자신을 잃어버리고 가상의 자신에게 몰입해 폭력이나 반사회적 행동을 유도할 수 있다. 그 극단이 살인이다. 살인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정신적 이미지가 현실로 전환되는 것이다. 늘 꿈꾸던 공상이 실제로 행해지면서 엄청난 희열을 느끼게 된다. 그런 쾌감은 쉽게 중독된다. 연쇄살인범 정남규가 담배는 끊어도 살인은 못 끊는다고 말했듯이 엄청난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

30여 년 전 발생해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았던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이 밝혀졌다. 그가 가진 그 무서운 공상은 무엇이었을까. 모범수로 살아온 25년간의 복역 중에 그는 어떤 공상을 하면서 지냈을까. 때로는 인간을 성장시킬 수 있는 공상이 때로는 연쇄적 죽음과 관련된다. 그래서 섬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