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광종의 CEO 한자] 용기가 없으면 물러서지도 못한다
중국 춘추시대 범려(范·BC 536~BC 448 추정)는 월(越)나라 왕 구천(勾踐)을 도와 오(吳)를 꺾는 데 성공한 책략가다. 중국 역사 무대에 등장하는 인물 중 지혜가 매우 두드러진다. 이유는 제때 물러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라이벌 오나라를 제압하는 데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서 탁월한 공로를 세웠으니 그는 최고의 공신(功臣)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사랑한 여인 서시(西施)와 함께 강호(江湖)로 도망친 뒤 이름을 바꾸고 사업을 벌여 결국 부를 쌓는 길에 나섰다.

부하와 성공의 결실을 제대로 나누지 않으려는 품성의 군주 구천의 사람됨을 믿지 못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그는 달콤한 유혹을 모두 끊고 강호에 몸을 맡긴다. 그런 그의 행동을 두고 중국인들은 거센 물길에서 용감하게 물러난다는 뜻의 ‘급류용퇴(急流勇退)’라는 표현을 썼다.

어딘가로부터 물러나는 退(퇴)라는 글자에 왜 ‘용기’라는 의미의 勇(용)을 붙였는지 궁금해진다. 그 용기의 본질은 ‘과단(果斷)’에 있다. 열매를 뜻하는 果(과)와 단호히 끊는다는 뜻의 斷(단)이다. 앞의 果(과)는 ‘열매’ ‘과실’의 새김에서 발전해 ‘단단하게 맺어진 상태’라는 의미까지 얻었다. 따라서 ‘果斷(과단)’은 ‘과감하게 끊어 버리다’의 뜻이다.

사실 앞으로 나아가는 일보다 물러나는 것이 더 어렵다. 오욕칠정(五慾七情)의 감성체인 사람은 속에서 번지는 수많은 욕망에 눈과 마음이 쉽게 어두워진다. 따라서 그런 욕망을 끊는 일은 아무나 할 수 없다. 그러니 물러남에 용기가 필요하다는 뜻에서 굳이 ‘勇退(용퇴)’라고 적었을 테다.

나아가고 물러남은 모든 종류의 싸움이나 다툼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모두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때를 맞추지 못하면 낭패를 당하기 십상이다. 몸은 몸대로 망가지고, 이름은 이름대로 무너진다.

중국에서는 이 경우를 ‘身敗名裂(신패명렬)’이라고 적는다. 늑대가 웅크렸던 자리처럼 이름이 크게 망가진다는 뜻에서 ‘聲名狼藉(성명낭자)’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냄새나는 이름이 멀리 퍼진다고 해서 ‘臭名遠揚(취명원양)’이라고도 한다.

나아갈 줄만 알았지 적절한 때와 분위기에 맞춰 물러서지 못하는 높은 지위의 사람이 우리 사회에는 퍽 많다. 명리(名利)나 좁은 소견(所見)에 가려 도덕적 규범에 관한 성찰을 놓치기 때문이다. 제 이름만 망가뜨리면 그만이지만, 사회가 그로써 더 어두워지니 큰 문제다.

유광종 < 중국인문경영연구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