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필리핀 미군 철수에서 배워야 할 교훈
남중국해 파라셀군도(시사군도)와 스프래틀리군도(난사군도)에서 중국과 베트남 그리고 필리핀 간 해양 영토분쟁이 치열하다. 1974년 베트남이 실효 지배하던 파라셀군도를 중국 해군이 무력 점령했다. 당시는 북베트남이 한창 중국과 손잡고 미국과 싸우고 있을 때다. 영토욕을 위해서라면 동맹의 가치를 헌신짝처럼 버리는 중국의 진면모가 드러났다.

남중국해 영토 분쟁에선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중국이 같은 공산국가인 베트남은 그렇게 거칠게 다루면서 필리핀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섬들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당시 필리핀에 미군이 주둔하고 있어서였다.

그런데 필리핀이 우리로선 정말 이해하기 힘든 ‘악수’를 둔다. 자주, 평화, 주권을 내세우며 “양키, 고 홈(go home)!”을 외친 것이다. 놀라운 건 미군기지 주변에서 장사하던 주민들까지 시위 행렬에 뛰어들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반미주의자들의 선동에 속은 것이다. ‘미군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외국인 투자 공단을 만들면 글로벌 기업이 몰려온다.’ 당시에는 아주 그럴듯하게 들렸다. 결국 1992년 미군이 필리핀을 떠났다. 그런데 고대하던 외국 기업들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글로벌 기업은 정치적 리스크가 큰 나라에 절대 투자하지 않는다.

필리핀의 당혹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미군이 떠나자 중국이 기다렸다는 듯이 스프래틀리군도의 스카버러섬(황암도·黃岩島)을 무력으로 점령해버렸다. 필리핀은 ‘법에 호소하겠다’며 국제상설재판소에 제소해 승소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은 코웃음을 치며 군 비행장까지 갖춘 해양요새를 만들었다.

요즘 자주와 평화를 외치는 집권세력은 전시작전권 회수와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파기, 반일이 마치 우리의 주권을 회복하는 ‘애국의 길’인 것처럼 행동한다. 이건 완벽한 환상이다. 우리가 필리핀으로부터 얻는 교훈은 미군이 철수하면 그 공백을 중국이 파고들어 결과적으로 엄청난 경제적·영토적 불이익을 당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 동북아에선 ‘슈퍼 파워’, 즉 미·일 동맹과 중국이 치열한 패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지난 5월 방일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경항공모함 가가호에 탑승한 것은 동북아 안보의 지각 변동을 가져오는 역사적 사건이다. 태평양 전쟁 범죄국이어서 공격용 무기인 항공모함을 가질 수 없었던 일본에 항모 보유를 허용한 것이다. 여섯 척의 항모전단을 갖겠다고 설쳐대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일본 해군과 손잡는 미국의 새로운 군사 전략이다.

“중국을 위협세력으로 본다면 지소미아 파기는 좀처럼 생각할 수 없는 결정이다. 지소미아는 단순한 한·일 두 나라 문제가 아니라 중국의 부상 등 미래에 대처하기 위한 한·미·일 3국의 핵심 안보 이슈다.” 지난주 방한한 존 햄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소장의 따끔한 일침이다. 지금 워싱턴DC에선 ‘문재인 정부가 한국을 미·일 동맹에서 끌어내 중국 쪽으로 선회시킨다’고 우려하고 있다.

경제는 이념이 달라도 같이할 수 있다. 그러나 안보와 동맹은 ‘가치’를 공유해야 한다. 집권세력의 마음에 안 들더라도 미국과 일본은 우리와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하지만 중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나라다. 6·25전쟁 때는 서울을 짓밟은 나라이기에 절대 우리와 안보 가치를 공유할 수 없다.

“미제의 침략에 맞서 북조선을 도운 정의로운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에서 승리해 국위를 떨쳤다.” 2017년 중국 인민해방군 건군 90주년 행사에서 시진핑 주석이 한 발언이다. 일본은 과거를 사과하지 않지만, 중국은 한술 더 떠 과거를 미화한다. 우리는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우기는 동북공정과 이어도를 놓고 중국과 영토분쟁을 하고 있다. 남중국해에서 동남아 국가들이 당하는 것을 보면 주한미군이 없을 경우 ‘중화제국’이 우리를 어떻게 험하게 다룰지 짐작할 수 있다.

시 주석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한국은 과거 중국의 일부였다’고 말했다. 만약 집권세력이 역사적 과오를 저질러 우리가 미·일 동맹에서 이탈해 중화제국의 그늘에 다시 들어가면 중국의 ‘21세기형 신(新)속국’으로 전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