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종태 증권부장
[정종태의 데스크 시각] 시장이 희망을 버린다면…

외환위기가 한창이던 1998년 10월. 노무라증권의 한 보고서가 시장을 뒤흔들었다. ‘대우에 비상벨이 울린다.’ 이 보고서로 금융권은 대우그룹에 대한 자금회수를 본격화했고, 결국 대우는 해체의 길로 치달았다. 당시 이 보고서를 쓴 애널리스트 K씨는 국내 중형 증권사 사장이 돼 있다. 얼마 전 만난 K사장은 대뜸 “한국 주식은 머릿속에서 지웠다”고 했다. 자산의 10%만 어쩔 수 없이 한국 주식에 넣고, 나머지는 해외 주식과 채권에 투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국 주식으로는 수익을 낼 가능성이 낮아서다. 지난 9년간의 성과가 극명하게 말해준다고 했다.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벗어난 2011년 초 대비 주요국 지수 수익률(지난 19일 종가 기준)을 보면 미국 다우존스지수는 134.8% 올랐다. 일본 닛케이지수도 112.9% 상승했다. 같은 기간 한국 코스피지수는 거꾸로 0.7% 하락했다.

'시장이 시장을 버리고 있다'

국내 최고 운용사를 이끌다가 지금은 사모펀드로 간 K회장도 비슷한 얘기를 했다. 한때 70조원에 달하는 자산을 굴리며 글로벌 큰손들에게 ‘VIP’ 대접을 받았던 그 역시 국내 주식은 관심 밖인 지 오래다. K회장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10년 전에는 해외 기관투자가나 글로벌 기업 최고경영자(CEO)를 만나도 해줄 얘기가 많았어요. 그만큼 주요 분야에서 한국이 앞서갔기 때문이죠. 잘난 체하다 보면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곤 했습니다. 하지만 요즘엔 더 이상 해줄 얘기가 없어요. 우리가 앞서가는 분야가 급속히 사라져가고 있다는 겁니다.”

주식에 투자하는 건 기업을 사는 것인데, 한마디로 국내 기업은 살 게 없다고 했다. 암울한 얘기다. 시장이 시장을 버리고 있다는 의미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K회장은 “그나마 앞서 있는 게 반도체와 2차전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선두 자리를 위협받고 있다고 걱정했다.

왜 그렇게 됐을까. 그는 국내 기업의 ‘헝그리 정신’과 ‘야성적 충동(animal spirit)’이 사라진 걸 첫 번째 이유로 들었다. 무(無)에서 뭔가 새로운 사업을 일궈내려는 모험정신, 도전정신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창업가 시대가 지나가고 2세, 3세, 4세 후계자 시대가 도래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했다.

돈만 투입하면 된다는 정부

두 번째 이유, 역시 정부다. K회장은 “돈이면 다 된다는 정부의 빈곤한 철학이 시장을 망치고 있다”고 했다. 벤처 창업시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코스닥벤처펀드를 조성한 것을 예로 들었다. 핵심은 창업 생태계가 작동할 수 있도록 규제를 풀고 환경을 조성해주는 것인데 아직도 돈만 투입하면 된다는 구닥다리 사고에 빠져 있다는 것이다. “스스로 뭐가 위기이고 문제인지 분간을 못 하는 ‘메타인지 장애’에 빠져 있다”고도 했다.

시장이 시장 스스로에 대한 희망을 버릴 때만큼 심각한 위기 징후는 없다. 요즘 자산시장 움직임을 보면 심상치 않다. ‘한국’이 붙은 자산은 인기가 없다. 한국 주식은 물론 한국 통화(원화), 한국 펀드(국내펀드)는 모조리 투자자로부터 외면받는다. 인기가 높은 주가연계증권(ELS) 등 파생상품도 기초자산이 국내물보다는 해외물인 게 더 인기다. 한마디로 한국물은 찬밥 신세다.

개인과 기업이 한국을 떠나는 이유를 눈감고, 시장의 자포자기를 그대로 방치하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결국 국내 투자는 고갈되고, 증시는 침체되고, 돈은 떠나고, 창업 기업들은 자금조달 길이 막히고 … 경제는 긴 침체의 악순환에 빠져들지 모른다.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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