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물갈이'와 '판갈이'
국회의원 선거 때마다 나오는 말이 ‘물갈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올해도 각 당 공천의 핵심 키워드로 떠올랐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의 현역 의원 물갈이는 40명을 넘을 모양이다.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물갈이 폭이 더 커져 ‘세대 교체’ 수준에 이를 것이라는 말도 나오고 있다. 제1 야당인 자유한국당의 공천 기준 역시 ‘인적 쇄신’이다.

각 정당이 경쟁적으로 물갈이에 나서는 것은 기성 정치권에 대한 유권자의 불신과 반감 때문이다. 역대 선거에서도 물갈이 비율이 높을수록 승률이 높았다. 17대 총선 때 승리한 열린우리당의 물갈이율(68.2%)은 한나라당(42.0%)보다 훨씬 높았다. 18대 한나라당(46.6%), 19대 새누리당(42.5%), 20대 더불어민주당(46.3%)의 승리에도 높은 물갈이가 적지 않게 기여했다.

한국의 국회의원 물갈이율은 50% 선으로 미국 상·하원 의원 교체율(13~15%)의 3배 이상이다. 그런데도 ‘구태 정치’가 반복되고 있다. 역대 최대 물갈이를 한 17대 국회 때는 과거사법·국가보안법 등을 놓고 4년 내내 싸웠다. 이후에도 계파 싸움에 이합집산을 거듭하며 ‘후진 국회’ 소리를 들어야 했다.

초선(初選) 의원이 늘어나도 다선(多選) 중심의 국회에서는 ‘거수기’ 역할에 불과한 경우가 많았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역풍 속에서 치러진 17대 총선 때는 열린우리당 초선 의원이 108명(71.1%)이나 됐다. 이들의 ‘초보 의정’ 때문에 ‘108번뇌’라는 별칭까지 등장했다. 양적인 물갈이보다 질적인 변화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다.

전문가들은 “한국 정치의 판 자체를 갈지 않고서는 새 정치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지적한다. 김형오 전 국회의장은 “진정한 물갈이 대신 썩은 물에 물고기만 갈아 넣어선 고기가 살지 못한다”며 “이젠 판갈이를 해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그는 보수야당을 향해서도 “보수주의로 진보하라. 국민이 믿을 때까지 모범을 보이라”고 주문했다.

정치인들이 진정으로 국민을 위한다면 못 할 게 없다. 프랑스는 ‘의회의원 25% 감축, 특권·부패 척결’ 등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파격적인 정치 개혁에 힘입어 ‘늙은 프랑스’에서 ‘젊은 프랑스’로 바뀌고 있다. 그 덕분에 산업 경쟁력이 높아지고 실업률은 낮아졌다. 우리에게도 판갈이가 절실하다. 그게 안 되면 유권자들이 직접 판을 뒤집을 수밖에 없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