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100년 기업'의 길
세계 기업의 평균수명이 15년에 불과한데, 100년 넘게 존속하는 기업은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국내에 10곳뿐인 ‘100년 기업’ 중 하나인 (주)보진재(寶晉齋)가 영업 부진 끝에 인쇄사업을 접는다고 한다(한경 9월 10일자 A1, 8면 참조).

보진재는 1912년 ‘보진재석판인쇄소’로 출발해 4대(代), 107년간 한우물만 판 국내 최고(最古) 인쇄기업이다. 김진환 창업자가 북송시대 서예가 미불의 서재 이름에서 회사명을 따왔다. 젊은 층에는 낯설겠지만 중·장년층이면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1950~1960년대 ‘철수와 영희’가 등장하는 교과서를 인쇄했고, 대입 예비고사 문제지도 찍었다.

보진재 하면 무엇보다 성경과 사전을 떠올리게 된다. 얇디얇은 종이(박엽지) 인쇄는 높은 숙련도가 필요한데, 성경 인쇄에 보진재만 한 곳이 없었다. 한때 세계 성경의 30%를 공급했고, 지금도 100여 개국에 수출한다. 그러나 디지털시대에 쓰나미 같은 출판·인쇄업계 불황을 피할 길이 없었다. 사전이 전자사전으로, 성경까지 읽어주는 전자책으로 대체되고 있다. 인쇄단가가 20년째 제자리인데 생존경쟁은 더 치열하다. 10년 적자에 더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이다.

사람의 생로병사처럼 기업도 흥망성쇠를 피할 수 없다. 어떻게 적응하고 대처하느냐가 사활을 좌우한다. 코닥과 후지의 엇갈린 운명이 이를 웅변한다. 1880년 설립된 코닥은 디지털카메라를 세계 최초(1975년)로 만들고도 아날로그 필름을 고집하다 132년 만에 파산했다. 반면 후지는 과감히 주력을 디지털카메라로 전환하고, 문서솔루션 제약 화장품 등 다각화로 여전히 건재하다.

화투를 만들던 일본 닌텐도 역시 수차례 부도위기를 겪었지만 비디오 게임, 건강을 접목한 위(Wii) 등으로 변신하며 130년을 이어오고 있다. 덴마크 레고도 지금의 화려함 뒤에는 역경과 부침으로 점철된 87년의 역사가 있다.

자고나면 달라지는 시대에 변하지 않고는 내일을 기약할 수 없다. 장수기업들은 시계초침처럼 빠른 환경 변화와 지구 공전(365일)과도 같은 사회구조 및 거대 트렌드 전환에 적응하며 기본에 충실하다는 공통점이 있다.

‘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박물관 하나가 불타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듯이, 100년 기업의 퇴장은 우리 문화사에 큰 손실이다. 한 집안에서 최초 상호를 100년 넘게 유지해 온 보진재였기에 더욱 아쉽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