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현실 칼럼] 흔들리지 않는 산업구조는 없다
‘전력·지하자원 개발, 기계·철강공업 육성, 비료·육종 등 식량문제 해결, 의류문제 해결, 과학원 창설….’ 1952년 4월 27일 북한의 과학자 대회에서 나온 과제들이다. 의식주 문제를 ‘국내 자원과 국내 기술로 해결하라’는 자력갱생, 자급자족 정책이다. 김일성은 “이것이 ‘주체사상’”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경제개발을 시작하면서 ‘피라미드식 전략’을 채택했다. 섬유제품을 예로 들면 최종제품→중간제품→중간원료→기초원료 등 순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확보해가자는 전략이었다. 지금의 글로벌 분업은 그런 과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남북한의 선택 결과는 지금 보고 있는 그대로다.

글로벌 가치사슬(GVC)은 기업이 그 활동을 기능별로 나눠 전 세계에서 가장 적합한 국가에 배치하는 국제 분업이다. 가치사슬 개념을 최초로 제시한 글로벌 컨설팅사 맥킨지는 올해 1월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통상 갈등, 관세 부담, 신기술 등장 등 무역환경의 변화로 GVC가 구조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냈다.

제품을 생산하는 글로벌 가치사슬에서 무역집중도(총수출/총생산)가 줄어들고, 서비스 무역이 제품 무역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저비용 노동에 의존한 무역은 줄어들고, 글로벌 가치사슬의 지식집약도가 높아지고, 협력업체들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는 지역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보고서는 또 이런 변화를 설명하는 요인으로 글로벌 수요의 지리적 이동, 국내로 향하는 중국의 공급망, 디지털 혁명 등 신기술의 등장에 주목했다. 일각에서는 세계화의 종언을 말하지만, 글로벌 기업들은 무역환경과 기술 변화에 따른 기회와 위험, 비용 등을 따져가며 최적의 GVC를 끊임없이 탐색하고 적응해 나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문재인 대통령이 “특정 국가와 특정지역 의존형 산업구조를 바꾸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이 말하는 특정 국가란 일본이다. 여기서 생겨나는 의문은 글로벌 분업과 협력을 ‘특정 국가 의존형인지 아닌지’ 판별하는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으로부터 수입한 546억달러 가운데 소재·부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53%인 현실을 의존형으로 규정하면, 한국의 기술도입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육박하는 것은 어떻게 봐야 할까?

지난해 중국은 한국 전체 수출의 26.8%를 차지했고, 한국이 90% 이상 수입하는 품목 수에서도 중국(208개)은 일본(51개) 미국(40개)을 압도했다. 이것은 또 어찌 봐야 할까? 이 모든 게 의존형이고, 그래서 바꿔야 한다면 산업구조의 종착점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산업구조는 누가 설계한 게 아니다. 개별 기업들이 생존과 성장에 가장 유리한 GVC를 선택한 결과란 점에서 단순히 수치나 비중만으로 의존형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 더구나 한국은 자국 중심의 공급망을 꿈꿀 수 있는 미국, 중국 등의 국가와는 다르다. 전체 수출 가운데 GVC를 통한 비중이 60%를 넘는다. 이를 의존형이란 시각에서 접근하면 수출도, 성장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GVC 참여 비중이 높은 한국 입장에서 GVC가 흔들리거나 끊어지는 것은 위험 요소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럴 경우를 대비해 기업의 GVC를 보호해 주라고 있는 게 정부 아닌가. 일본의 수출규제로 취약점이 드러났다면 일본이 함부로 행동할 수 없도록 한국만의 비교우위 사슬을 확보하거나 정치·외교적 안전장치를 마련해야지, 정부가 나서 특정 국가와의 GVC를 바꾸겠다는 것은 기업을 위한 일이 아니다.

어차피 무역환경과 기술은 끊임없이 변한다. 그때마다 기업들은 살아남기 위해 새로운 GVC를 찾아 나서야 한다. 정부가 일본만, 소재·부품만 바라보다 무역판의 전체 변화를 놓치면 그 또한 기업에는 재앙이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산업구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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