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승윤 칼럼] 한국, 동북아 안보균형 잡는 린치핀 돼야
일제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로 한국과 일본의 ‘틈새’가 크게 벌어졌다. 외교로 풀 수 있는 사안이 경제 전쟁으로 비화됐고, 불매운동으로까지 번졌다.

이런 와중에 중국과 러시아의 연합 군사훈련이 지난주 동해 상공에서 이뤄졌다. 양국 전투기들이 떼지어 출몰했다. 러시아 조기경보기는 독도 영공을 침범했다. 독도는 한·일 양국의 틈새를 더 벌릴 수 있는 급소다.

그 틈새로 분출시키려는 에너지는 뭘까. 글로벌 경제위기 이후 10여 년간 축적된 힘의 불균형이다.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위기는 1930년대 대공황에 버금가는 충격을 줬다.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들은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반면 중국 러시아 등 브릭스(BRICS)로 대표되는 개발도상국들은 선방했다. 그 결과 경제력에 큰 지각변동이 생겼다. 세계 안보질서를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에너지다.

2010년 일본을 제치고 세계 2위 경제대국(국내총생산 기준)으로 떠오른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에서 주변국들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미국에는 ‘신형 대국관계’를 요구했다. “서로의 핵심이익을 존중하는 대등한 두 강대국 관계로 바꾸자”는 내용이다. 미국은 사실상 거절했다. 대만으로의 무기 판매, 남중국해에서의 ‘항행의 자유’ 작전 지속 등 중국의 ‘핵심이익’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아시아 외환위기 직후 국가부도에 빠졌던 러시아는 원유 등 원자재값 급등에 힘입어 부활했다. 그 힘으로 우크라이나 크림반도를 2014년 점령했다. 이제는 중국과 우호관계를 돈독히 다지면서 태평양 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에 맞서는 동북아시아 대척점은 일본이다. 일본 자위대는 아시아 지역에서 미군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보충자 역할을 해왔다. 미국은 여기에 한국도 동참시켜 강력한 동북아시아 안보질서를 만들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일본과의 군사동맹에 대한 한국의 뿌리 깊은 거부감이다. 6·25전쟁 때 일본의 지원 문제가 거론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 땅에 일본군이 들어온다면 북한군과 협력해서라도 축출하겠다”고 유엔군을 위협했다. 그때의 정서가 아직도 남아 있다.

북한 핵도 변수다. 미국 국방부 산하 국방대학은 한국과 일본이 미국의 전술핵무기를 공유하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는 보고서를 최근 내놨다. 북한의 핵 위협에 대응하는 차원을 넘어 중국까지 압박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과 일본의 독자적인 핵 무장도 막을 수 있는 카드다. 하지만 북한과 중국의 거센 반발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

동북아시아는 언제 무력충돌이 벌어지더라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험해졌다. 그 한가운데에 한국이 있다. 최악의 지정학이다. 하지만 거꾸로 보면 세계 평화질서를 가운데에서 꽉 잡아주는 린치핀(linchpin)이 될 수 있다. 린치핀은 바퀴가 이탈하지 않도록 축에 꽂아두는 핀이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2010년 한·미 동맹을 강조하면서 한국에 이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한·미 동맹을 기본축으로 해서 중국 일본을 강하게 연결하는 아시아 중심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한국은 2008년부터 정례화된 한·중·일 정상회의 탄생을 주도하는 등 그런 역할을 해왔다. 한·중·일 3국 협력사무국도 서울에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핵심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한·미 동맹에 대한 확고한 의지 표명보다는 중국 눈치를 지나치게 살피는 ‘전략적 모호성’을 남발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안보와 경제를 놓고 저울질하는 모습에 많은 사람이 실망했다. 중국 러시아는 물론 북한마저 대놓고 한국을 무시하고 있다.

일본과의 싸움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기든 지든 그 결과로 일본과의 연결이 끊어진다면, 그런 싸움을 해서는 안 된다. 미국과 일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우리와 공유하는 나라들이다. 한·일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끊을 게 아니다. 한·미·일 안보협력체제로 발전시켜야 한다. 여기서 생기는 강력한 힘으로 중국 러시아와 강하게 연결해야 한다. 그래야 돌발 변수들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

hyuns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