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엉뚱한 나라와 벌이는 잘못된 싸움
조선 14대 임금 선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리 좋지 못하다. 무엇보다 수많은 조짐에도 불구하고 안이하게 판단해 조선 팔도를 황폐화시키고 조선인을 어육으로 만든 ‘7년 전란’을 막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무능한 선조조차도 무언가 나쁜 조짐이 보이면 스스로를 경계하고 조야의 현인들로부터 국가 경영의 방략을 물었다. 이는 율곡 이이가 올린 상소문 ‘만언봉사(萬言封事)’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현재 한국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은 국가적 위기의 징후 정도가 아니라 국가적 위기 그 자체라고 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세 차례의 남북한 정상회담과 두 차례의 미·북 정상회담이 있었지만, 북한의 비핵화와 관련한 가시적 결과는 사실상 전무한 상태에서 북한은 탄도미사일의 수중 발사가 가능한 3000t급 잠수함을 공개하고 ‘저고도 활공 도약궤도’를 지닌 신형 탄도미사일까지 발사했다. 이들은 한국군과 미군이 보유한 미사일방어체제를 무력화하는 무기다.

주목되는 것은 이 신형 미사일에 대한 미국 반응이다. 미국은 미사일 사거리가 600㎞에 불과해 미국에 직접적인 위협은 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될 게 없다고 여기는 것 같다.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의심하는 국가정보국 국장은 경질해 버렸다. 이 때문에 혹시라도 미국이 미국 본토에 도달하는 대륙간탄도탄만 만들지 않으면 북한을 사실상의 핵국가로 인정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더해지고 있다.

지난 1일에는 일본이 안보상의 이유를 들어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레지스트, 불화수소(에칭가스) 등 세 가지 품목에 대해 한국을 포괄적 수출 허가 대상에서 제외했다. 이들 품목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제조에 사용되는 핵심 소재다. 나아가 다음달 2일에는 전략물자 수출절차 간소화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할 가능성도 크다. 한국의 첨단산업에 심각한 타격을 줄 이 두 가지 조치는 연 2.2%까지 떨어진 한국의 성장률(한국은행 전망치)을 더욱 끌어내릴 공산이 크다.

23일에는 러시아 군용기가 한국 영공을 침범하는 일도 있었다. 외국 군용기가 한국 방공식별구역(KADIZ)에 무단으로 진입한 건 여러 차례 있었지만 영공 침범은 전례가 없다. 이날 영공 침범은 중국·러시아 전략폭격기의 동시 KADIZ 무단진입과 함께 벌어졌다. 중·러의 군사력이 한꺼번에 한국을 상대로 도발한 것은 6·25전쟁 정전 이후 처음이다. 태평양 진출을 노리는 중국과 러시아가 한·미, 한·일 관계가 소원해진 틈을 타 약한 고리를 찔러본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

구(舊)한말 상황을 연상시키는 일련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과연 얼마나 위기의식을 느끼는지 그리고 대응책에 얼마나 골몰하는지 의문이다. 노골적으로 협박하는 북한에 대해서도, KADIZ를 제집 드나들 듯하는 중국에 대해서도, 영공을 침범한 러시아에 대해서도 사실상 함구하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미국 및 일본과의 공조가 절실한 상황이지만 우리 정부는 유독 일본에 대해서만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국가 안보와 영토 보존에 훨씬 더 직접적인 위협을 가하는 북·중·러에 대해서는 제대로 맞서지 않으면서 경제와 안보 측면에서 협력과 공조가 필요한 일본에만 각을 세우는 게 과연 필요한 일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는 “피할 수도 있었던 전쟁(unnecessary war)”이라고 평했다. 그럼에도 전쟁이 일어난 것은 유권자들의 반전(反戰) 정서, 이에 편승한 정치인들의 맹목적 평화주의 그리고 안이함과 희망적 사고 때문이었다고 처칠은 회고록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지적하고 있다. 이 ‘영국판 징비록’에서 처칠은 공포와 유혈에 기초한 독재체제의 등장에도 지도자들은 “불편한 현실과 대면을 거부하고, 국익을 무시한 채 대중적 인기만 갈망했다”고 개탄한다.

‘표’를 위해서라면 국가 존망의 문제마저 외면하는 정치인들은 독일의 야망과 전쟁 준비를 인지하고도 애써 침묵하고 부인했다. 문재인 정부가 북·중·러는 놔두고 유독 ‘일본 때리기’에만 골몰하는 것은 국민의 평화 희구와 반일 정서에 편승한 맹목적 평화주의와 정략적 계산에 따른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