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석 금융부장
[안재석의 데스크 시각] 헬조선 시즌2

숫자는 부끄럼쟁이다. 적절한 질문과 꾸준한 호기심이 더해져야 겨우 말문을 연다. 요즘 몇 가지 숫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하나는 한국은행에서 나왔다. 국내 거주자의 해외 부동산 취득용 송금액이다. 지난해 총 6억2550만달러를 기록했다. 우리 돈으로 7000억원을 조금 넘는 규모. 수조원짜리 통계가 흔한 한은에선 눈에 띄지 않는 수치다. 그나마 정기적으로 발표되지도 않는다. 이따금 국회에서 요구해야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과거와 비교해야 겨우 입체감이 살아난다. 2013년엔 1억8100만달러였다. 5년 새 3배 이상으로 불었다.

"마음이 떠나는 게 문제"

금융권에선 눈치를 챈 지 오래다. 자산가들을 겨냥한 은행의 해외 부동산 투자 설명회는 연일 만원이다. 외국 부동산에 투자하는 사모펀드도 조기 매진되기 일쑤다. 또 다른 수치가 힘을 보탠다. 이번엔 외교부 자료다. 해외 이주 신고자 통계. 작년 한 해 2200명이 신청서를 냈다. 얼마나 이례적인 수치인지 파악하려면 대조군이 필요하다. 2년 전 수치(455명)를 갖다 대니 숫자에 혈액이 돈다. 2008년 이후 최대치. 네 자릿수를 기록한 것도 9년 만에 처음이다.

지난주 저녁 자리에서도 이 수치가 화제에 올랐다. ‘저요! 저요!’ 소란스런 초등학교 교실처럼 참석자들의 목격담이 이어졌다. 미국 일본 등의 부동산을 사들이는 사람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는 얘기가 꼬리를 물었다. 아예 이민을 고려하는 지인도 많다고 했다. 간간이 “나도 여건만 되면…”이라는 고백도 끼어들었다. 대화 주제는 ‘기업 투자’로 튀었다. 국내에 공장을 설립하려는 기업인이 드물다는 첩보가 오고 갔다. 그만큼 해외로 나가는 기업이 늘고 있다는 뜻. ‘엑소더스’는 숫자로 뒷받침된다. 지난 1분기 국내 기업의 해외 투자액은 141억1000만달러. 분기 기준 사상 최대치다.

술이 돌수록 나라 걱정이 늘어갔다. 상속세가 나오고, 최저임금에 근로시간 단축까지 끼어들었다. ‘회전문 인사’를 보고 희망을 접었다는 푸념도 나왔다. 말수가 적던 한 참석자가 결론을 내렸다. “돈이 아니라, 마음이 떠나는 게 문제예요.”

'경제=심리'라는 평범한 진리

‘헬조선’은 청년들의 전유물이었다. 2007년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나온 이후 유행어가 됐다. 청년들은 삶이 고단할 때마다 ‘헬조선’을 되뇌었다. 거기서 각박한 현실을 견딜 한 줌의 위안을 얻었다. “내 잘못이 아니야”라는.

요즘 들어 헬조선이 변이를 시작했다. 이번엔 50대 이상 장년층의 마음이 이 땅, 이 나라에서 떠나고 있다. 기업인과 금융인 등 실물 경제를 움직이는 계층 사이에서 이런 징후가 더 뚜렷하다. 경제에 미치는 파장도 결이 다르다. 그들은 기업과 금융회사의 의사 결정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위축된 심리는 활발한 투자를 가로막는다. 부정적인 방향의 ‘자기 실현적 예언’은 경제 상황을 더욱 암울한 방향으로 이끌게 된다. ‘헬조선 시즌2’가 더 걱정인 이유다.

부끄러움을 걷어낸 숫자는 실체를 가리킨다. 해외 부동산 투자와 이주 신고자, 기업 투자 등에서 튀어나온 수치는 일관되게 ‘불황’과 ‘침체’라는 단어를 지목한다. 숫자가 생명력을 얻으면, 이제 마지막 단계다. 순수하게 숫자와 대면하는 것. 《팩트풀니스》라는 책을 쓴 안나 로슬링 뢴룬드는 최근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국가 리더가 본능이나 이념이 아니라 데이터에 기반할 때 보다 좋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yagoo@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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