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학영 칼럼] 일본에 보여줘야 할 대한민국의 진면목
일본인은 어디에서 왔는가. 《총, 균, 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 UCLA 교수가 쓴 논문 제목이다. 인류문명의 수수께끼를 파헤쳐 퓰리처상을 받은 책의 개정증보판 말미에 ‘특별논문’으로 첨부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현대 한국어는 신라어에서 비롯됐고, 일부 전해지는 고구려어 단어는 한국어보다 일본어와 비슷하다”며 “(고구려계가 주축을 이룬) 한국인의 이주가 현대 일본인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을 제시했다. 백제 유민이 현대 일본인의 주종을 이룬다는 기존 학설과 다르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은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와도 같다”는 결론은 다르지 않다.

두 민족은 ‘쌍둥이’답게 위기 상황을 기회로 바꿔 도약을 이뤄내는 역량에서 닮은꼴을 보여 왔다. 1970년대와 1980년대, 미국 정부는 일본 제품의 급격한 수출을 억누르는 조치를 잇달아 내놨다. ‘자율규제협약(voluntary restraint agreement)’을 강요하며 일본 자동차회사의 수출물량을 제한했다. 일본산 제품의 가격경쟁력을 꺾기 위해 엔화 가치를 억지로 끌어올리는 조치(1985년 플라자 합의)도 밀어붙였다. 1945년 달러당 360엔으로 출발한 엔·달러 환율이 76엔까지 떨어졌다. 극한의 압박에 몰린 일본 기업들은 사즉생(死卽生)의 승부수를 던졌다. 가격에 구애받지 않는 고급 제품과 핵심 소재·부품 개발이었다. 도요타의 럭셔리 승용차 브랜드 렉서스가 이때 나왔다. 전자회사 소니는 프리미엄 TV 개발과 함께 2차전지 등 부품·소재사업을 키웠다. ‘명성은 TV에서 얻고, 돈은 부품·소재에서 번다’는 말이 이즈음 등장했다.

한국인도 일본인 못지않은 치열함으로 ‘위기극복 열전’을 써왔다. 6·25동란의 잿더미를 딛고 전 세계에 단 7개국뿐인 ‘30-50클럽(1인당 소득이 3만달러를 넘으면서 인구가 5000만 명 이상인 국가)’에 가입한 저력은 세계사적으로 유례가 없다. 그 과정에서 몇 번의 고비가 있었다. 정부가 품질이 월등하게 앞서던 일본 제품으로부터 국내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시행한 ‘수입선 다변화’ 정책을 폐기했을 때가 특히 그랬다. “다변화 정책을 풀면 기업들 다 망한다”는 걱정과 반대가 거셌다. 기업들은 배수진을 친 기술·품질·디자인 개발로 이 고비를 넘겼다.

삼성과 LG의 TV가 오히려 일본 제품을 국제무대에서 꺾어버리는 대반전(大反轉)을 일궜다. 삼성전자에 초보단계의 반도체 기술을 전수했던 샤프 산요전자 등 일본 기업들이 삼성에 밀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미국 할리우드와 일본 방송·연예가 등으로부터 국내 산업을 보호하던 조치를 해제했을 때도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관련 기업들은 필사적인 생존대책 마련에 들어갔고, 세계시장을 뒤흔드는 영화와 K팝 작품을 쏟아냈다.

일본 정부가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분야 핵심 소재의 한국 수출을 규제하는 조치를 내놓으면서 기업들에 다시 한 번 큰 위기가 닥쳤다. 수출 제한품목을 더 늘려 한국 기업에 대한 타격 강도를 높일 것이라는 협박도 흘리고 있다. 한·일 간 외교 마찰의 불똥을 애꿎게 기업들이 뒤집어쓰게 됐지만, 기업도 국가의 일부인 만큼 어쩔 도리가 없다. 이제까지 숱한 고비를 넘기며 세계 수준의 경쟁력을 길러온 기업들이기에 ‘이번에도~’를 기대하고 응원하는 목소리가 크다.

하지만 ‘이번에도~’가 가능할까. 과거 위기 때에 비해 장담할 수 없는 상황 변화가 생겼다. 옛날처럼 기업이 마음껏 역량을 발휘할 수 없게 만드는 규제가 늘어났다는 게 무엇보다도 문제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게 업종·직종을 가리지 않는 일률적이고 강압적인 주 52시간 근무제도 시행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비상근무 등의 대응을 할 수 없게 원천 봉쇄돼 있다. 기업가들의 과감한 연구개발 투자와 신속한 경영 의사결정을 어렵게 하는 안전 환경 분야 제도장벽 문제도 심각하다. 대통령과 30대 기업 대표들이 어제 긴급간담회를 갖고 일본의 경제보복에 대한 대책을 논의했지만 이런 문제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경황이 없어 그랬다면, 이제라도 차분하게 짚어봐야 할 것이다. 스스로 날개를 꺾어버리는 바람에 일본이 마음 놓고 한국을 흔들어대도록 자초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이학영 논설실장 ha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