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엽의 논점과 관점] 우물안 판검사들
7년 전 대법원이 심은 시한폭탄이 기어이 카운트다운에 돌입했다. 김능환 당시 대법관(현재 율촌 변호사)은 ‘징용 소송’ 상고심에서 징용근로자의 정신적 고통에 대해 일본 기업들이 위자료를 지급할 것을 주문했다.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개인 청구권도 모두 소멸됐다’는 우리 정부의 일관된 입장을 부정한 파격적 판결이었다.

김 대법관은 당시 “건국하는 심정으로 판결문을 썼다”는 소회를 남겼다. 하지만 그가 쏜 화살은 ‘건국’이 아니라 ‘파국’이라는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모습이다. 일본은 초유의 경제보복 카드를 꺼내들었고, 두 나라는 출구가 어디인지 모르는 미로로 접어들었다.

국제규범 등한시한 '징용 재판'

대법원발(發) 혼란은 한국을 배회 중인 ‘관제 민족주의’와 ‘삼류 포퓰리즘’에 사법부마저 포획됐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킨다. 의당 적용돼야 할 국제규범인 ‘사법 자제의 원칙’이 무시된 정황이 뚜렷하기 때문이다. 사법 자제란 외교·안보 관련 재판 때 내용을 가장 잘 알고 책임도 큰 행정부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으로,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원칙이다. 영국과 프랑스 법원은 조약 해석 시 ‘행정부 의견 조회’를 필수 절차로 두고있다. 미국 연방대법원 역시 “조약 해석 시 행정부가 일관되게 지지해 온 입장에 큰 비중을 둬야 한다”고 판시했다.

개발도상국에서도 사법 자제의 원칙은 통용된다. 필리핀 대법원은 “일본이 사과하고 배상도 했다”는 행정부 의견을 받아들여 위안부단체의 개별청구권 요구 소송을 기각했다.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정부의 의견 제시와 법원의 수용은 이처럼 ‘사법권 침해’와는 무관하다. 행정부의 주장을 배척하는 것이야말로 재판부의 일탈로 간주된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사법 자제의 원칙이 실종 상태다. 국제법과의 정합성을 찾기보다 ‘주관적 신념에 따라 재판하면 된다’는 그릇된 ‘소신 판사’들이 늘고 있다. 현직 판사가 “재판은 정치”라고 말하는 상황에서 ‘자제’라는 단어는 사치가 되고 있는 듯하다.

사법 자제에 대한 검찰의 인식 부족은 더 심각하다. 법원과 행정부의 소통 일체를 ‘재판 거래’로 몰고 있다. 선진국 사례를 참조해 2015년 ‘참고인 의견서 제출제도’를 도입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재판 거래’라는 혐의로 기소했다. 징용 재판에 대한 일본의 문제 제기를 접수한 박근혜 정부의 요청으로 공익재판 시 국가기관과 지방자치단체의 의견서 제출을 허용한 게 ‘사법 농단’ 논란으로 비화한 것이다.

징용 판결은 내용에서도 국제법적 근거가 취약하다. “국가 간 조약에도 불구하고 개인청구권은 남아 있다”는 핵심 결론부터 ‘조약은 문언(文言)의 통상적 의미에 따라 해석돼야 한다’고 정한 빈 협약에 배치된다. 한일청구권협정은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명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대신 받은 자금이 피해 국민에 대한 보상용도로 사용되지 않은 경우에도 개인 청구권은 소멸된다는 게 국제사법재판소(ICJ)의 판례다.

'안방판결·수사'는 국익 위협

‘건국’이라는 말까지 언급하며 비장하게 임한 판결이 여러 부작용을 낳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해방 이후 처음으로 한국이 일본에 모종의 부채의식을 느낄 만큼 묘한 흐름마저 형성되고 있다. ‘가해자 일본’에 대해 오랫동안 가져온 ‘도덕적 우위’도 사라져가고 있다. 치졸한 경제보복에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일본의 ‘선처’를 바라고 있는 데서 분명해진다. 최고 엘리트집단인 사법기구 내에서 확산되는 민족주의적·정파적 경향에서 나라 문을 걸어 잠그고 권력 놀음으로 지새우다 열강의 먹잇감이 된 구한말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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