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메이드 인 재팬' 없이 살기
일본의 경제보복에 분노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불매 리스트가 도는가 하면, 일본여행 취소도 속출한다. 일본차(車) 주유 거부 주유소, 일본 제품 판매 중단 마트도 등장했다. 소셜미디어(SNS)에는 “가지 않습니다, 사지 않습니다”라는 온라인 포스터가 퍼지고 있다.

일본 제품을 사거나 일본으로 여행 가면 ‘매국노’ 취급을 받을 판이다. 여당 국회의원은 “의병을 일으킬 일”이라고 거들었다. 심지어 아이돌그룹의 일본인 멤버 퇴출 요구까지 점입가경이다.

국가 간 마찰이 대중의 자발적 불매운동으로 이어진 사례는 드물지 않다. 2012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분쟁 때 중국에선 지금 우리와 비슷한 일본 제품 불매운동이 벌어졌다. 미국 아메리카노 커피도 영국의 차(茶) 세금 등 횡포에 맞서다 생겨났다. 국민의 일치단결한 모습은 상대국에 압박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해 1000만 명이 한·일 양국을 오가는 시대에 불매운동이 부를 부작용도 따져봐야 한다. 정작 그 피해가 국내 수입·유통·판매·여행업계 종사자와 일본에 사는 동포·유학생·취업자에게 돌아갈 수 있어서다. 여건이 민단 중앙단장이 “한·일 관계는 우리(재일동포)에게는 사활의 문제”라고 문재인 대통령에게 호소할 정도다. 감정의 골이 깊어질수록 보복조치에 반대하는 일본 경제계와 양식 있는 일본인들의 입지가 더 좁아질 것이다.

보다 현실적인 문제는 ‘메이드 인 재팬(made in Japan)’이 없으면 우리가 더 힘들어진다는 점이다. 맥주 담배 의류 등 소비재는 대체재라도 있지만, 일본의 핵심 부품·소재 없이는 스마트폰 자동차 정밀화학 등 국내 산업이 안 돌아간다. 이런 일본 제품은 ‘인텔 인사이드’처럼 눈에 잘 안 띈다. 병원의 초음파 CT 등은 일본산이 태반이고, 방송도 일본 장비 없이는 촬영·송출이 어렵다.

게다가 자유, 민주, 헌법 등 개념어와 전문용어가 대부분 근대 일본의 조어(造語)에서 왔다. 우동 돈가스 라멘 이자카야 등은 한국인의 생활 속에 녹아들었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인기도 인기지만, 이를 원작으로 한 ‘올드보이’ 같은 영화나 드라마도 만들지 않았나. 비분강개하는 불매운동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정말 절실한 것은 절치부심하며 일본을 이길(克日) 실력을 키우는 것이 아닐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