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일의 배타적 민족주의
아시아 상생체제 일거에 위협
고립 자초한 한국, 돌파구 있나"

조일훈 편집국 부국장
[조일훈 칼럼] 동아시아 휘감는 민족주의 광풍

동아시아는 중동 못지않은 화약고다. 남과 북의 대치, 중국과 일본의 반목, 공산주의와 자유주의 진영 간의 대립이 복합적·중층적으로 얽혀있다. 일대일로(一帶一路)를 앞세운 중국 공산당의 패권적 민족주의는 주변 국가들과 끊임없는 정치적·군사적 긴장을 야기하고 있다. 여기에 북핵이라는 치명적 위협이 우리 머리 위를 맴돌고 있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을 매개로 한 우방이다. 하지만 과거 역사에 발목이 잡힌 한·일 관계는 냉랭하다 못해 적대적인 양상으로 치닫고 있다. 양국 정부가 의도적으로 민족주의를 부추긴 측면이 강하다. 문재인 정부는 반일(反日)을 적폐청산과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지렛대로 활용했다. 일본의 아베 정부는 과거사와 독도 문제 등에서 우경화의 길을 걸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민족주의다. ‘우경화’라는 표현은 일본 언론들이 작위적으로 만들어낸 이상한 단어다. 우경화가 잘못된 것이라면 좌경화가 바람직하다는 역설이 성립하기 때문이다. 섬나라인 일본은 고립을 자초할 수 있다는 이유로 민족주의라는 단어를 애써 피하고 있을 뿐이다.

유감스럽게도, 동아시아에는 이런 민족주의 분출을 조절할 수 있는 초국가적 조직이 없다. 가까운 장래에 그런 기구가 나올 것 같지도 않다. 숱한 분쟁과 전란을 겪고도 어엿한 국가연합을 이뤄낸 유럽과 대조적이다.

그럼에도 그동안 지역 내 갈등과 긴장이 적정 수위를 넘지 않은 것은 미국의 조정자 역할과 함께 세계 GDP(국내총생산)의 20%를 차지하는 한·중·일 3국의 상호의존적 교역 덕분이었다. 일본-한국-중국으로 이어지는 거대 제조업 생태계는 지역의 안정과 협력 유지에 결정적 역할을 해왔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유일한 나라다. 유럽의 앞선 과학기술과 군사장비를 도입하면서 과거의 봉건적 질서를 근대적 법률과 제도, 합리적 이성으로 빠르게 대체하는 데 성공했다. 일본이 한국과 중국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기긴 했지만 서양의 우월한 지식과 기술을 아시아로 들여오는 도관(導管)역할을 한 것도 사실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수십 년째 이어져온 한국의 대일무역 적자가 그 증거다.

한국 기업들이 서구가 아니라 일본 기술을 흡수한 이유는 일본이 아시아적 산업체제에 맞게 효과적으로 기술을 가다듬고 변형시켰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제조업 후발주자인 중국 기업들은 자신들과 격차가 큰 일본의 원천기술보다 한국이 만들어낸 실전지식과 응용기술을 더 선호했다. 지금까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국제분업이자 공생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일본은 이번에 반도체 소재 공급을 중단하면서 한국의 주력산업에 타격을 가했다. 동아시아 전체의 경제 파이프라인에도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중국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수출금지 조치를 비난하고 있지만, 정작 자신도 사드보복 조치를 거두지 않고 있다. 오히려 시진핑 국가주석은 지난달 말 문재인 대통령을 만나 2년이나 지난 사드 배치 문제를 따지기까지 했다. 중국과 일본의 권력자들은 더 이상 협력과 공존에 관심이 없어 보인다. 각자도생의 위험한 길로 빠져들고 있다.

정말 유감스럽게도, 한국은 이런 일본과 중국을 맞상대할 힘이 없다. 내부 분열도 극심하다. 트럼프가 중재 역할을 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나오지만 한국을 대하는 태도는 예전 같지 않다. 일본의 경제보복에 이례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아베로부터 사전 언질을 받았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한국은 점점 고립돼 가고 있다. 일시적이 아니라 추세적이라서 더 불길하다. 국내 만연한 반미·반일 감정에 타개안을 마련하기도 쉽지 않다. 자업자득이다. 문재인 정부가 ‘우리 민족끼리’를 고집할수록 중·일의 민족주의 광풍은 더 세질 것이다. 사방에 늑대들이 몰려들고 있는데 변변한 친구 하나 없는 대한민국은 온전할 수 있을까.

ji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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