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인 10명 중 8명꼴로 “통일보다 경제가 더 중요하다”고 여긴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설문조사 결과는 남북한 문제를 보는 국민의 시선이 결코 감상적이지 않음을 일깨워준다. 보사연이 ‘통일과 경제 중 하나를 골라 해결한다면 경제 문제를 택하겠다’는 진술에 대한 동의 여부를 묻는 설문항목에 전체 응답자(3873명)의 77.1%가 동의한 것이다. 또 ‘통일을 위해 조금 못살아도 된다’는 항목에 53.2%가 반대하는가 하면 ‘남북한이 한민족이라고 해서 반드시 하나의 국가를 이룰 필요는 없다’는 항목에는 55.9%가 동의했다.(한경 6월 8일자 A9면)

이번 조사결과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통일에 앞서 경제부터 제대로 살려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 삶을 희생해가면서까지 통일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인식이다. 다른 곳도 아닌 국책연구기관이 ‘통일이냐, 경제냐’를 묻는 국민인식조사를 했고, ‘통일보다 경제’가 국민 다수의 뜻임을 여과없이 공개한 것은 의미를 부여할 만하다. 이를 계기로 정부는 경제활력을 되살리고 나라곳간을 채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고 시급함을 인식해야 한다.

국가재정이 튼튼해지려면 세금을 내는 기업과 가계가 제대로 돈을 벌어야 할 것이다. 그러려면 기업활동의 족쇄를 풀어 민간에서 일자리가 생겨나도록 해야 한다. 나라 운명이 기로에 섰을 때 튼튼한 재정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는 1997년 말 외환위기 극복과정이 단적으로 보여줬다.

요즘 상황은 그때와는 정반대로 흘러간다. 재정을 투입할 곳이 늘기만 하는데 재정을 확충할 길은 별로 안 보인다. 특히 걱정스러운 것은 세계 최고속도의 저출산과 고령화로 인해 재정기반이 급속히 약화되고 있다는 현실이다. 역대 정부부터 현 정부까지 출산, 육아, 교육, 취업, 실업, 의료, 노후 등 각 단계·분야별로 경쟁하듯 무상복지를 늘려온 결과다. 복지를 더 늘리지 않아도 재정부담이 급증하는 구조다. 세입과 기존 재정으로 모자라면 국채 발행 등 나랏빚을 늘릴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정부는 “국가채무비율이 다른 나라들에 비해 현저히 낮다”며 무상복지 프로그램 확대 행진을 지속할 태세다.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통일이 이뤄진다면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 될 것이란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경고다. 통일 시 북한 안정을 위한 초기비용만도 1조달러(약 1180조원)가 든다는 전망(미국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도 나와 있다. 지금의 남북한보다 경제 격차가 훨씬 작았던 동·서독이 1990년 전격 통일 이후 겪은 극심한 혼란과 경제적 고통은 반면교사(反面敎師)로 남아있다. 게다가 한국은 통일이 되면 북한지역에도 온갖 무상복지를 똑같이 시행해야 하느냐를 둘러싼 논란을 피하기 어렵다. 최저임금의 지역별 차등화가 ‘지역차별을 공식화해 안 된다’는 정부 주장은 통일 이후 북한지역 경제개발에 큰 걸림돌이 될 소지도 있다.

경제도 통일도 ‘국가 백년대계(百年大計)’라는 안목과 비전 아래 제대로 된 큰 그림이 절실하다. 통일이 민족 염원이고, 그래서 꼭 이뤄야 한다면 치밀하게 현실을 살펴 하나씩 챙기고 준비하는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정부는 그 일을 어떻게 인식하고 다뤄왔는지를 이 기회에 철저히 돌아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