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철 논설위원
[김태철의 논점과 관점] 싱가포르의 '냉방복지' 비결

말레이반도 남단에 있는 열대국가 싱가포르. 6월 평균 최고 기온이 섭씨 31.3도에 달하지만 실내에선 더위를 거의 느끼지 못한다. 18도에 맞춰진 에어컨 설정 온도 때문에 시원하다 못해 온몸이 서늘할 정도다. ‘실내 적정 온도 가이드라인’으로 여름철 공공기관 사무실 온도를 26도 이상으로 사실상 통제하는 한국과 사뭇 다른 모습이다.

싱가포르의 ‘에어컨 사랑’은 남다르다.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고(故) 리콴유 전 총리는 에어컨을 ‘싱가포르 성공의 1등 공신’으로 꼽았다. 그는 생전에 “에어컨 덕분에 하루 24시간 경제활동이 가능해졌다. 총리가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공공기관에 에어컨을 설치해 업무 효율을 높이는 일이었다”(《리콴유 자서전》)고 회상하기도 했다.

민영화로 전기요금 인하 경쟁

싱가포르에선 이른바 ‘냉방복지’가 모든 국민이 누리는 ‘보편적 복지’가 된 지 오래다. 서민들은 에어컨을 펑펑 틀지는 못하지만 큰 부담 없이 필요할 때 필요한 만큼 이용할 수 있다. 가정용 전기요금이 1킬로와트시(㎾h)당 0.2싱가포르달러(약 168원, 2017년)로 우리나라에 비해 약간 비싼 수준이지만 다양한 맞춤형 요금제를 활용하면 전기요금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싱가포르가 ‘냉방복지’를 실현하게 된 원동력은 뭘까. 전기의 약 98%를 비싼 액화천연가스(LNG) 발전에 의존하지만 에너지 수송비용과 송전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파이프를 통해 말레이시아산(産) LNG를 대규모로 들여오는 데다 인구가 밀집해 송전에 따른 전기 손실도 크지 않다.

하지만 이런 이점도 다른 여건을 감안하면 한국보다 크게 나은 상황은 아니다. 협소한 국토와 대기 오염 우려 탓에 발전 단가가 LNG에 비해 1.5~2배 정도 저렴한 석탄과 원자력 발전을 못하고 있다. 전기 생산과 판매를 아우르는 전력산업 전반의 높은 효율성이 한국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한국전력의 독점 체제인 한국과 달리 싱가포르는 전력시장이 경쟁체제다.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회사가 15곳, 판매사가 27곳이 있다. 이들은 고객 생활패턴과 에너지 소비패턴에 맞춰 20여 개가 넘는 맞춤형 상품을 내놓고 있다. 시장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요금이 내려가고, 에너지 효율성은 상승하는 선순환 구조가 형성되고 있다. SP에너지그룹 등은 2017년 수요반응시스템, 스마트홈 등을 연계한 신기술로 전기 공급가를 7% 정도 내렸다.

본말 뒤바뀐 요금제 개편

정부는 최근 누진제 폐지를 주요 내용으로 하는 ‘가정용 전기요금 개편안’을 내놨다. 매년 반복되는 ‘냉방요금 폭탄’ 논란을 잠재우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가정용 전기요금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6개 회원국 가운데 세 번째(2017년)로 싸다. 저렴한 요금과 저효율 에너지 소비구조 탓에 1인당 전기 사용량도 일본, 영국, 독일 등 주요 선진국보다 많다. 전기 과소비를 줄이고 요금을 합리적인 수준으로 조정하는 방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정부가 전기요금 개편에 앞서 가계 부담을 덜어줄 근본 대책부터 내놔야 한다. 요금 상승 요인인 탈(脫)원전 정책 폐기를 차치하더라도 싱가포르처럼 전력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면 소비자 부담이 크게 줄어들 것이다. OECD 회원국 중 전력시장 경쟁체제를 도입하지 않은 나라는 한국, 멕시코, 이스라엘 3개국에 불과하다.

정부가 민영화로 전력시장 경쟁을 촉진한다면 ‘냉방요금 폭탄’ 논란은 상당 부분 해소될 것이다. 스마트 전력 시스템 개발 등 관련 산업도 덩달아 육성할 수 있다. 미봉책(요금제 개편)이 아닌, 소비자 부담을 줄이고 시장을 키우는 근본 대책(전력시장 경쟁체제 도입)이 시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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