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노사관계 제도 개선이 먼저다
지난 22일 고용노동부가 국제노동기구(ILO) 핵심협약 비준안 동의와 입법을 동시에 추진하겠다고 발표하면서 ILO 협약 비준이라는 실타래가 더욱 엉키게 됐다. 정부의 방침 변경은 정책의 신뢰성을 떨어뜨리며 ILO 협약 비준 관련 법제도 개선 논의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동안 정부는 국민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협약에 대해서는 이해당사자의 충분한 의견 수렴이 필요하기 때문에 ‘선(先)입법, 후(後)비준’ 방식을 택하겠다고 밝혀왔다. 정부가 비준과 입법을 동시 추진할 경우, 시간에 쫓겨 이해관계 당사자들의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 노사관계 제도개선 방안이 마련될 가능성이 높다.

이 같은 정부의 방침 변경에는 한·EU(유럽연합) 자유무역협정에 규정된 ‘ILO 핵심협약 비준 노력 의무’ 조항을 근거로 EU가 우리나라와 분쟁해결 절차에 들어간 점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일부 전문가들은 EU가 무역과 노동기준의 연계를 강화하면서 조세, 규제 등 다양한 제재를 가할 수 있어 ILO 협약 비준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과장된 측면이 있다. 한·EU 자유무역협정 제13장(무역과 지속가능발전)에는 무역제재에 관한 조항이 없다. 고용부 역시 미(未)비준의 경우에도 특혜관세 철폐나 금전적 배상의무와 같은 경제적 제재는 발생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EU의 분쟁해결 절차 개시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대응해 나가야 하지만, 이를 계기로 불안감을 조성하면서 협약 비준을 재촉해서는 안 된다. 서로 다른 노동기준으로 인해 통상분쟁이 발생하면 정부가 우리나라 노동시장의 현실을 이해시키면서 대등하게 협상을 진행해 해결해야 할 문제다.

ILO 협약 비준을 위한 논의가 우리나라의 노동기준을 국제기준에 맞추는 과정이라고 보면, 노동 관련 규정 전반에 대한 검토도 이뤄져야 한다. 근로자의 단결권 강화 못지않게 사용자의 방어권 내지 대항권 관련 규정도 국제기준에 맞게 살펴야 한다. 대부분의 국가들처럼 쟁의행위 때 대체근로를 허용하고 직장점거 형태로 이뤄지는 사업장 내 쟁의행위를 금지하는 것이 한 예다. 사용자만 처벌하는 부당노동행위 규정은 노조가입 강요, 파업참여 강요 등 노동조합의 행위에 대해서도 적용되고 단체협약의 유효기간도 연장돼야 한다.

안타깝게도 국제기구가 발표하는 자료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노사 간 협력 수준은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해고자와 실업자의 노조 가입을 허용하고 노조전임자 임금지급 금지를 없애면 사용자와 노동자의 대립은 더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률이 마이너스를 보이고 기업 경영실적이 악화되고 있는 현 경제상황에서 노사 대립은 더 큰 어려움을 몰고 올 수 있다.

현행 노동관계법에는 ILO 협약이나 국제기준과 상충되는 내용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이런 쟁점들에 대한 해결 없이 정부가 비준을 서두르면 노사관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 ILO협약 비준이라는 엉킨 실타래를 풀기 위해서는 노사 간 힘의 균형이 유지되고 국가경쟁력을 제고할 수 있는 노사관계 제도 개선방안을 먼저 마련해야 한다. 급할수록 돌아가는 지혜를 발휘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