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들이 ‘조세피난처’를 찾아 국적을 옮기려는 움직임은 한국 얘기만이 아니다. 지난해 세계에서 고국을 등지고 다른 나라로 떠난 백만장자는 10만 명이 넘었다. 글로벌 자산가들은 상속·증여세가 낮은 국가를 선호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19일 시장조사업체 뉴월드웰스에 따르면 지난해 100만달러(약 11억원) 이상을 보유한 자산가 중 타국으로 이주한 수는 세계적으로 10만8000여 명에 달한다. 2013년 대비 두 배 이상 늘어난 수치다.

낮은 상속세 찾아 떠난 글로벌 부자들, 지난해에만 11만명
백만장자들이 많이 이주하는 상위 5개 국가는 호주, 미국, 캐나다, 스위스, 아랍에미리트(UAE)였다. 호주와 캐나다, UAE는 상속·증여세가 없다. 미국은 1120만달러까지 상속·증여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는다. 스위스는 안정적인 국내외 정치 상황과 10%대의 낮은 실질 상속세율이 인기 요인으로 꼽혔다. 백만장자가 많이 떠나는 상위 5개국은 중국 러시아 인도 터키 프랑스로 나타났다. 중국에서는 지난해에만 1만5000명의 백만장자가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뉴월드웰스는 정부 주도의 경제와 강력한 자본 감시 등이 부자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부자들의 ‘고국 이탈’ 현상은 한국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50만달러를 미국에 투자하고 영주권을 얻는 ‘미국 투자이민(EB-5)’ 비자 발급 건수는 2015년 116건에서 지난해 531건으로 4배 이상으로 늘었다. EB-5는 직업 조건과 언어 구사 능력을 요구하지 않아 자산가들이 선호하는 이민 유형으로 꼽힌다. 캐나다 영주권을 취득한 한국인 수도 지난해 4800명에 달해 2015년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높은 상속·증여세율을 원인으로 지목했다. 한국의 상속세 명목세율은 최고 50%로 일본에 이어 세계 2위 수준이다. 하지만 최대주주의 할증률을 포함하면 최고세율은 65%로 단연 1위다. 세율이 높다 보니 전체 세수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한국조세재정연구원에 따르면 국내 전체 세수 대비 상속·증여세 비중은 1.3%에 달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의 평균인 0.34%를 크게 웃도는 수치다.

주요 국가는 부(富)의 해외 유출을 막기 위해 상속·증여세 부담을 낮추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미국은 지난해 상속세 면제액 범위를 기존 549만달러에서 1120만달러로 늘렸다. 싱가포르와 오스트리아는 2008년, 노르웨이는 2014년에 상속세를 없앴다.

한국은 오히려 상속세 부담을 늘리고 있다. 2017년 말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으로 상속·증여세를 자진 신고할 경우 감면해주는 세액공제율이 작년 7%에서 5%로 낮아졌고 올해는 3%까지 떨어진다. 상속세율 골격은 20년 전인 1999년 최고 세율이 45%에서 50%로 인상된 뒤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배태웅 기자 btu104@hankyung.com